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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시인 / 生에게
명상 박물관 앞 안내표지판을 수줍게 숨긴 11월의 은행나무와 그 나무들의 이야기가 끝없이 펼쳐지는 노란 은행나무길의 저 너머까지 바람을 맞으며 지켜보았다 우수수 떨어지면서 기꺼이 아름답게 쓰여지는, 쓰러지는 노란 잎들 노란 잎들의 마지막을
제가 키운 무게를 한 번도 짊어져본 적 없는 풍경은 저토록 아름다울 수 없고 다시 또 그 빛나는 공중을 내려놓지 않은 자 기필코 행복할 수 없어서
눈부심을 버리는 눈부심 미풍의 허공 같은, 그런 나무를 닮은 사람 만난 적 있어서
오랜 전생처럼 낯익은 바람결을 따라 져 내리는 동반자의 미소가 내 캄캄한 그림자 위로 노란 심장과 같이 떨어져
닿았다
세상의 모든 최소한의 존재들이 밟고 내려오는 無의 계단들을 따라
내가 쓰고 싶은 보이지 않는 우리의 노랗고 먼 문장들이
허민 시인 / 크로스
크로스를 아세요? 철로처럼 나란히 달리는 그런 거 말고 엉뚱하게 가로질러 꼬여버리는 엑스 자의 바느질 같은 싹둑싹둑 자르는 가위 같은 밤을요
반대편에서 짝다리를 짚으며 껌을 씹는 밤이에요 바로 세우면 도시의 캄캄한 밤을 밝히는 붉은 신성한 십자가 같기도 한 그러나 x 모양으로 굴러다녀야 좀 제맛인 문자들을, 제발 옳지 않도록! 일부러 틀리는 문(門)의 출구를요
너를 아세요?
매일 저녁 지그재그로 운동화 끈을 매고 온 너와 갈지 자로 걸어가던 밤들을 신이 뿌려놓은 소금마냥 별들이 서성이던 별똥의 빗금이 가로지르는 실패한 것들의 아름다움을요
서로의 몸을 횡단하며 나누던 밤의 체위들을 어긋나며 돌아서던 별과 이별의 나날들을 아세요, 그렇게 단단하게 묶이던 가는 실들을
벌어진 자국을 꿰맬 때, 검은색 크로스를 따라 두 가지 종류의 시간들을 교배시켰다 아무는 게 아니라 흉터는 크로스의 문양을 따라 처음의 화려함을 버리고 소박한 마음으로 무럭무럭 자라났지, 보이지 않게
와, 그거 아세요?
네가 보일 때 너의 신발이 보일 때 말하지 마세요, 너의 리본이 지금 막 풀어졌다고 이 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가 너의 얼굴 위로 크로스를 때리며 눈물과 마구 마구 뒤섞였다고
대신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고 젖은 땅 위로 숨을 쉬기 위해 올라온 지렁이들의 춤사위처럼 흐물거리는 너의 끈을 아주 아주 촌스러운 옛날 방식의 무늬로 꼭 조여 맨 x자 형태로 두 손가락으로 귀여운 발을 바라보며 크로스의 수갑을 묶을 뿐!
너의 발목을 아세요, 그 가는 발목과 밤의 골목들을 거기에서 가로지르며 터져나오는 봄밤 골목나무의 백치 같은 사상과 서로의 등을 감싸 안는 크로스의 입술을 크로스, 크로스처럼 부드러운 혀의 발음을
뚜벅뚜벅 조용히 침묵을 나누던 발의 음악들을 아세요?
그 밤을 아세요? 아세요, 아실 겁니다 내가 너의 운동화 끈을 말 없이 묶어주었으니 하나의 시간이 또 다른 시간을 단단히 감싸 안았으니
2015년 제4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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