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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진돈 시인 / 풍설야귀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3.

김진돈 시인 / 풍설야귀인

ㅡ최북

 

 

  미술관으로 향해 걷고 있을 때

  좁은 골목길에 남루한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조실부모한 후 한양에서 움막집에 살며

  세간살이 하나 없는 단칸방에서

  종일 그림만을 그렸다지

 

  아침 한 장 그려 아침을 먹고

  저녁 한 장 그려 저녁을 때우고

 

키는 작지만 반골기질이 충만한 야인

가난해도 아무에게나 그림을 팔지 않았던 위풍당당

돈푼께나 있다고 거들목거리거나 함부로 하는 사람이면 바가지를

씌우거나 그림도 팔지 않았다는,

양반이랍시고 동양화에 왜 물이 없냐고 빈정거리면

그림 밖은 다 물이라고 몰아쳤던

 

  그의 기개를 보고 있었다

 

  매섭고 괴팍한 개성이 화선지 밖으로 뻗쳐 나오는

  한바탕 쏟아 부을 것 같은

  때로는 부드럽고 따뜻한

  고독한 狂生

 

  손가락으로 거칠게 먹물을 긋는 그의 눈빛과 마주치자 덜컹, 꿈을 깼다

 

  세차게 눈보라치는 눈보라 속을 헤치고 태연히 걸어가는 그림 속 나그네 거침없는 성격의 고달픈 자신인가

  사회에 대한 반항과 부정을 넘어

  기존의 통념에 도전한

  도화서 화원도 아닌 조선의 최초 직업화가였다지

 

  끝없는 절대 자유를 추구했던 호생관

 

  미술관에서 걸어 나왔을 때

  좁은 골목길에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는 사라지고 없었다

 

계간 『작가세계』 2017년 봄호 발표

 

 


 

 

김진돈 시인 / 질문이 쌓인 길

 

 

붉은 잎들이 눈을 뜬다

도시의 벽과 창은 캄캄한데

도시와 바닥은 질문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도시들

지나간 길들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이 누워있는 자세는 우울인가 남자인가 걸어가는 감정은 풀잎이 되고 황량한 들판이 움직이는 자세는 바람인가 여자인가 불안이 자란 흔적들

 

지나간 발자국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저녁이 벗어놓은 광기들

 

나무가 지나간 길이 있는 것이다

 

길이 고개를 돌리면

도시의 벽과 창은 캄캄해지는 것이다

질문이 끊어진 바닥들

 

모든 기억은 오늘로 돌아가고

어제의 감정이 스쳐간

새가 휩쓸고 간

 

흔적은 탁본처럼 허공에 선명하다

 

반년간 『이상』 2017년 상반기호 발표

 

 


 

김진돈 시인

전북 순창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및 대학원 졸업(한의학박사). 2011년《열린시학》과 《시와세계》 상반기에 등단. 시집으로 『그 섬을 만나다』(2012년, 시와세계), 『아홉 개의 계단』(2016년, 작가세계)가 있음. 『시담』 편집위원 역임. 현재, 운제당한의원장, 경희대 한의대 외래교수, 『포에트리 슬램』 편집위원, 송파문인협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