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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경나 시인 / 그리고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5.

홍경나 시인 / 그리고

 

 

  옆으로만 기어가는 것과 언뜻 눈을 맞추고 다시 엎드리는 것과 오늘의 신문과 어제의 뜯지 않은 우편물을 동시에 폐기하는 것과 손이 닿지 않는 곳마다 자꾸 비슷한 귀퉁이가 생기는 것과 오후 세시의 서랍처럼 단정히 말라가는 우산과 문득문득 돋는 참 많은 기억처럼 종일 날씨 탓을 해대는 것과 빗방울이 당연한 듯 우리 집 베란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사람처럼 론리플래닛을 뒤적여 보는 것 내용보다 삽화, 삽화보다 먼저 산토리니의 푸른, 푸른 하늘보다 먼저 고물대는 사람들에게 눈이 홀리는 것과 차례로 눈이 홀려가도 이심전심이 없는 것과 늘 제자리인 듯 한곳은 아니어서 그늘조차 없는 광장의 정오를 지나고 곧 사라지는 정지 화면 같은 정오를 지나고 막무가내 다시 정오가 되어가는 것과 이리저리 채널을 바꾸는 일과 일껏 자세를 고쳐 앉는 일을 적당히 드라마틱해지는 것이라 여기는 것과 책상 위에 차곡차곡 책들이 오래 들추지 않은 미완의 리포트가 기어이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과 찌무룩한 표정으로 들음들음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내 것이라 믿어보는 것과 어떤 모자란, 다른, 아닌, 여전히 나란한, 아무렇지 않게 길들여지는 것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 그리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 이기죽이기죽 목을 죄어오는 A' 귓전을 함부로 들락거리는 A'' 어디에도 가 앉지 못하는 자잘한 불면 A'''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보이지 않는 것과

 

 계간 『시산맥』 2016년 겨울호 발표

 

 


 

홍경나 시인

대구에서 출생. 2007년《심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