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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미정 시인 / 양을 세는 꿈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

김미정 시인 / 양을 세는 꿈

 

 

양들이 건너온다

 

양들은 희거나 더 희거나 투명하지

무심한 귀를 지나 안개를 지나

 

부드러운 털을 만지며 당신은 양머리를 하고 양 같은 표정이다 좁은 내 꿈의 폭을 구불구불 넓힌다 ‘양들이 서로 부딪쳐’

 

양 한 마리가 열 마리로 불어난다

난간에 간신히 매달린 양

 

불가마 안에서도

눈을 감고 양을 세는 사람들

넘어진 양들의 발자국은 해독되지 않고

 

울음은 어떤 모양의 은유일까

울고 있는 양들, 흐르는 울음은 셀 수 없다

 

온통 쌓여가는 바닥들, 벽들, 닫힌 문들,

 

당신이 빌려간 양들은 돌아오지 않는데

가끔 엇갈리는 어둠을 수건으로 닦으며

 

당신의 눈동자에서 양을 본다 ‘불안을 쓸어 담는 창이야’ 매일 밤 양 한 마리로 시작하는 진실은 있는 걸까

 

멀어서 혼자말로 가득한 저 꿈밖으로

양 한 마리가 달려 나간다

 

하얗게 보풀이 일어나는 이야기

우리가 뱉어낸

 

격월간 『시사사』 2019년 5~6월호 발표

 

 


 

김미정 시인

2002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2009년 《시와 세계》 여름호 평론 당선. 시집으로 『하드와 아이스크림』(시와세계, 2012)이 있음. 2012년 제3회 시와세계작품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