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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분홍 시인 / 걱정인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

김분홍 시인 / 걱정인형

 

 

걱정인형이 걱정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걱정이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걱정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걱정을 찾아 돌아다닌다 걱정은 연고지가 없으므로 연고지를 찾아 떠돈다 걱정은 일관성이 있다 걱정을 해도 찾아오고, 걱정을 하지 않아도 찾아온다

 

걱정인형의 태도는 일관성이 없다 걱정하지 않는 척 걱정하고, 걱정하는 척 걱정하면서 걱정을 전혀 모른다는 표정으로 웃는다 걱정 때문에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할 때, 걱정인형과 절대 눈을 맞추면 않된다 걱정을 감겨주는 것이 아니라 똘망똘망한 눈으로 걱정을 부추이기 때문이다

 

배게 밑에서 걱정을 걱정하지 않는 걱정인형은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잠들지 못해서 걱정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잠들기 위해서 걱정이 밤새 떠드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딸기걱정 바나나 걱정 굴 걱정 짓무른 걱정들이 소분되어 냉동실에 들어갔다 걱정이 얼면 성격이 되기도 한다

 

걱정을 걱정하지 않는 걱정인형의 걱정은 대부분 닥치지 않는 걱정이다 닥치지 않는 걱정을 닥친 걱정보다 더 걱정스럽게 걱정하다가 아침 7시, 나는 수면제를 삼킨다

 

월간 『모던포엠』 2019년 9월호 발표

 

 


 

 

김분홍 시인 / 붕장어 골목

 

 

 미끌미끌한 긴 몸, 말의 갈기 같은 지느러미만 있고 비늘 없는 골목에 어둠이 밀려든다 옆구리에 박음질되어 있는 골목의 숨구멍이 넓어지고 모든 게 싱싱해진다 비밀을 감추고 싶을 때 마다 수심은 달라진다 지금 막 들어선 골목에는 반점이 유영한다 굴성에 굴복하는 길, 빽빽한 등뼈는 어디로 뻗어가는 굴성일까? 수심이 찰랑거리는 이곳에 오면 누구든 기록이 된다

 

 야행성의 골목, 어두워지면 활동을 시작한다 장어 굽는 냄새, 전어 굽는 냄새, 오징어 굽는 냄새가 뒤섞일 때 골목은 심하게 출렁인다 그 순간 골목은 덫이다 쉽게 흘러들어 갈 수 있으나 한번 들어가면 일찍 빠져 나올 수 없는 문어발처럼 전단지가 살아 꼼지락거리는 바닥

 

 꼬리는 언제나 악착스럽게 힘이 세다 도마 위에서 머리가 잘려도 꿈틀거린다 어디까지가 몸통이고 어디까지가 꼬리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머리 따로 꼬리 따로 떠돈 탓에, 꼬리는 머리의 뒤통수를 앞 설 수 있다 꼬리는 머리를 망각한 체 꼬리를 차지하려고 늦은 밤까지 술잔을 내려놓지 못한다 꼬리뿐인 굴욕, 골목이 덫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계간『포지션』 2018년 겨울호 발표

 

 


 

김분홍 시인

충남 천안에서 출생. 201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2019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