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예강 시인 / 정원의 세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

김예강 시인 / 정원의 세계

 

 

정원을 걸어 나온다

 

오전의 장례미사는 슬퍼졌다가 슬프지 않았다

 

반 쯤 햇살이 내려앉고

반 쯤 그늘진 곳에서

 

마지막 골목을 걸어 나온다

햇살과 그늘이 시간의 반을 가지는 곳에서

 

지나간 시간에게 지금의 시간을 내준다

 

망각을 만나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팔을 뻗어보는 식물들

 

나뭇가지 사이 나뭇가지

그늘진 곳으로 어느새 어디선가

검고 긴 머리칼을 내리는 당신의 손들

 

아직 피어있구나

난 늘 그래

기억은 그래

맨 마지막까지 피어있는 꽃이라고 너는 그랬다

 

우리는 식물이 될 거라고 말했다

 

계간 『시와 사상』 2019년 봄호 발표

 

 


 

 

김예강 시인 / 순례일기

 

 

서책의 첫 페이지

당신의 생을 읽습니다

문체가 바뀐 길이 해석되지 않아

당신 마음의 행간을 어루만집니다

그러듯 내가 쓴 일기는 고스란히

보존되지도 전달되지도 않을

번지고 흐린 글씨로 씌어집니다

당신 마지막 일기의 앞에 놓여

한 권의 일기장이 됩니다

비로소 길을 또 만납니다

거꾸로 가는 시계태엽을 풀어

침묵에 빠져 걷습니다

길이 끝나는 자리에서

들은 귀와 본 눈으로

당신의 생은 씌어집니다

마음들이 끝까지 간 자리

가벽에 펄럭이는 말씀들

누가 보았소 누가 들었소

마음을 되찾아 돌아오는 길

맨발로 딱 일주일

태양의 산을 오릅니다

지도에 없는 영토

한 나무아래

어디였을까

잠시 마음을 잃었던 그 초입

길이 끝나는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 나는 걷습니다

 

격월간 『시와 표현』 2019년 9~10월호 발표

 

 


 

김예강 시인

부산교육대학교 및 同 대학원 졸업. 2005년《시와 사상》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고양이의 잠』(작가세계, 2014)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과 계간 『시와 사상』 편집장 역임. 현재 계간 『시와 사상』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