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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호 시인 / 꽃씨의 발바닥
꽃씨를 심은 지 보름이 지났는데 새싹은 머리카락 한 올 보여주지 않는다 측근이 전하는 말, 꽃씨에겐 땅속 동면이 필요하다는 것 마치 죽은 듯이 꼼짝 않던 전복이 꿈틀, 제 몸의 이미지를 전복하듯이 딱딱하고 죽은 것이, 아니 죽은 듯이 굳어 있던 꽃씨가 제 발바닥을 한번 만져본다는 것 발바닥이 꽝꽝 언 수행을 겪고서야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다는 것 내가 내 발보다 큰 남편의 슬리퍼를 질질 끌고 꽃밭으로 걸어 나와 쿵쿵, 타닥타닥, 발소리를 흔들어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들 큰 슬리퍼 사이로 손 넣어 흙 묻은 찬 발바닥 슬쩍 쓸어본다 죽은 척하는 것들끼리의 은밀한 교신
계간 『시인시각』 2011년 겨울호 발표
천수호 시인 / 꿩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저 혼자 뒤척인 울음소리인지 내 앞길에 끼어든 목소리인지 알 수 없을 때 대숲이 흔들린다 너머의 소리는 절규지만 깃털 하나 유쾌하게 날아오른다 잔설에 얽힌 발자국처럼 기척은 서로의 앞길을 간섭하고 지난 가을 낙엽은 내가 밟는 것들만 소리를 낸다 죽은 것의 비명이 커지면 죽은 것을 살려내지 못한 밤이 쩍 벌어진다 죽은 후 손톱 밑에 피를 내면 금방 다시 살아난다는 언니의 말을 믿던 시절이 있었다 그 숱한 밤 엄마는 임신 중에 꿩고기를 먹었다 울먹이면서 손톱 밑으로 바늘을 찔러댔지만 언니와 나는 살려내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날 밤이 자주 쩍쩍 벌어질수록 증오는 깊고 너머의 비명은 고요하다
계간 『시와 표현』 2015년 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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