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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명수 시인 / 거미집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

심명수 시인 / 거미집

 

 

죽죽 연필로 그었다

데생을 하고 볕의 농도에 따라 채색이 입혀졌다

지우개라는 건 필요치 않았다

그저 계절이 차면 옅어질 수 있겠다

늘어질 수 있겠다

그러다 녹아 흘러내릴 수 있겠다

생은 항상 위태롭기에

 

커튼이 펄럭이는 베네치아의 풍경

창안에 가득하다

바깥바람 불어 안 바람 밀어내도 곤돌라는 떠밀림이 없다

 

커튼이 출렁이면 풍경은 요동치며 도심은 일제히 물속에 발목을 담근다

생각의 뇌관을 씻어내고 있다

가끔 흔들리는 아치형 첨탑과 멀쩡하던 운하가 기우뚱 코너에 몰려 낭패를 당할 때는

 

찌그러진 아, 베네치아

4각의 창안으로 절규의 물결이 밀려든다

바람이 불 때 마다 조였다 폈다 조였다 하는 괄약근 운동

 

나의 방은 촘촘하나 물살 치는 언저리는 싱겁도록 뾰족하다

모퉁이가 모퉁이를 만났을 때 와장창 깨지는 꿈처럼 햇빛이 하얗게 일그러지면

도시는 빨갛게 익어 되도록 볕의 옷을 벗으려한다

 

덜 익은 부분과 완전 덜 익은 부분의 면면을 채운다

그 나름 햇빛의 편의적 마음이랄까

뒤집힌 샴페인 병 같은 곤돌라가 실어오고 실어가는

집집마다 항구다

 

푸른 서편 둔덕의 나무들

검은 먹의 마음도 풀리면 물결처럼 푸르러질 수 있을까

클래식한 바람이 하얗게 찢겨지는

 

덩그러니 서 있는 거미의 집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0월호 발표

 

 


 

심명수 시인

201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