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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노해 시인 / 노동의 새벽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4.

박노해 시인 / 노동의 새벽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 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박노해 시인 / 멈출 수 없지

 

 

빨리 빨리

바삐 아침을 지어 먹고

만원버스 따라 뛰며

종종종 바쁘게 걸어

후다닥 작업복 갈아입고

쓰왜앵―

열나게 하루를 돈다

 

긴 식사대열

식반을 받쳐 들고

국에 말아 훌 마시고

화장실 가서 찌익 오줌 누고 뭐 볼 틈도 없이

뻑뻑 담배 한 대 굽고

연장노동 들어가면

전쟁터처럼 정신 없이

굉음 속에 기계는 돌아가고

스피커 악악거리는

박자 빠른 디스코를

따라잡기엔 지쳐 버렸다

 

땀에 절어 맥풀린 얼굴들로

종종걸음 치며 공장문을 쏟아져 나와

인사조차 못나눈 채

검은 어둠 속으로 흩어지고

비탈진 골목길을 숨가쁘게 오르며

나는 때리면 돌아가는 팽이라고

거대한 탈수기에 넣어서 돌리면

돌릴수록 쥐어짜지는 빨래라고

하루, 일년, 죽을 때까지

정신 없이 따라 돌며

정신 없이 바뀌는 세상에

눈빛도 미소도 생각조차

속도 속에 빼앗겨 버렸어

 

전력을 다 짜내어 뛰어도

갈수록 멀어져만 가는

황새를 뱁새걸음으로,

공작새를 장닭으로,

승용차를 맨발로 따라 뛰며

죽기까지 손발을 멈출 수 없지

걷고 싶어도 주저앉고 싶어도

채찍보다 더 무서운

살아야 한다는 것,

노동자의 운명은

죽음이 아니라면 멈출 수 없지

 

오늘도 내일도

가면 갈수록 바쁘게 뛰어야 하는

갈수록 가진 것 없고 졸라매야 하는

고도로, 번영으로

급성장하는

우리는 복지국가 대한민국

뺑이치는

노동자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박노해 시인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고흥, 벌교에서 자랐다. 16세 때 상경하여 낮에는 노동자로 생활하고 밤에는 선린상고(야간)를 다녔다. 1984년 스물일곱 나이에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다. 1989년, 분단 이후 사회주의를 처음 공개적으로 천명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했다. 7년여의 수배생활 끝에 1991년 체포, 참혹한 고문 후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옥중에서 1993년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과 1997년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1998년 7년 6개월의 수감 끝에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