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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안진 시인 / 고란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4.

유안진 시인 / 고란초

 

 

너를 보면 말[言語]이란

얼마나 무력한 것이냐

 

너를 보면 원한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이냐

 

여리디여린 풀포기 한 점 앞에

세월이 어찌 비켜갔을까

 

검은 벼랑 끝에서도

한사코 살아남은 이름없는 궁녀여

 

네 혼령 푸르러 백마강은 흐르고

백제도 여직 살아 있으니

 

고란초 고란초 네 작은 몸매도

네 매운 이름도

 

발걸음 붙들어 멈춰 세우는

영원한 느낌표.

 

영원한 느낌표, 현대문학사, 1987

 

 


 

 

유안진 시인 / 과일가게에서

 

 

사과 배 밤 대추 그리고 알밤

저요 저요 저요 저요오

손을 들고 무릎걸음질 치던

국민학교 아이들

나도 그러던 빠알간 사과볼의 소년이었습니다

 

이슬 머금은 들국화로 피던 뒷집 누나를

사랑하고 사랑한 대추귓볼 붉은 청년이었습니다

 

고향이란 결국 떠난 자의 마음 속 세상이듯

사랑도 그렇게 이별 뒤의 혼자 마음이었습니다

 

쓰고 떫고 시고 맵던 세월의 고개고개를 넘으면

모든 맛은 달디 단 맛으로 곰삭아지는지

이제는 단감같은 중년도 넘친 나이

가을 과일 가게 앞에 절로 걸음 멈춰지는

반백의 소년으로 알밤 한 되를 삽니다.

 

구름의 땅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시와시학사, 1995

 

 


 

유안진 시인

1941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서울대 사대 및 동 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등단. 1970년 첫시집 『달하』를 간행한 이후 『물로 바람으로』(1975) 『월령가 쑥대머리』(1990), 『봄비 한 주머니』(2000) 등 10여 권의 시집과 시선집을 출간했고, 수필집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1988) 『축복을 웃도는 것』(1994) 등과 장편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1990) 『땡삐』(1994) 등의 작품이 있음.

그밖에 『한국의 전통 육아방식』(1987) 등 다수의 전공저서와 논문을 상재. 한국펜문학상(1996), 정지용문학상(1998), 월탄문학상(2000) 등을 수상.  현재 서울대 아동학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