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안진 시인 / 고란초
너를 보면 말[言語]이란 얼마나 무력한 것이냐
너를 보면 원한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이냐
여리디여린 풀포기 한 점 앞에 세월이 어찌 비켜갔을까
검은 벼랑 끝에서도 한사코 살아남은 이름없는 궁녀여
네 혼령 푸르러 백마강은 흐르고 백제도 여직 살아 있으니
고란초 고란초 네 작은 몸매도 네 매운 이름도
발걸음 붙들어 멈춰 세우는 영원한 느낌표.
영원한 느낌표, 현대문학사, 1987
유안진 시인 / 과일가게에서
사과 배 밤 대추 그리고 알밤 저요 저요 저요 저요오 손을 들고 무릎걸음질 치던 국민학교 아이들 나도 그러던 빠알간 사과볼의 소년이었습니다
이슬 머금은 들국화로 피던 뒷집 누나를 사랑하고 사랑한 대추귓볼 붉은 청년이었습니다
고향이란 결국 떠난 자의 마음 속 세상이듯 사랑도 그렇게 이별 뒤의 혼자 마음이었습니다
쓰고 떫고 시고 맵던 세월의 고개고개를 넘으면 모든 맛은 달디 단 맛으로 곰삭아지는지 이제는 단감같은 중년도 넘친 나이 가을 과일 가게 앞에 절로 걸음 멈춰지는 반백의 소년으로 알밤 한 되를 삽니다.
구름의 땅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시와시학사, 1995
|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추인 시인 / 스피노자의 아이들 (0) | 2020.01.04 |
|---|---|
| 황인찬 시인 / 생매장 (0) | 2020.01.04 |
| 허형만 시인 / 도미의 노래* 외 1편 (0) | 2020.01.04 |
| 강인한 시인 / 그 해 가을의 일기 외 1편 (0) | 2020.01.04 |
| 박노해 시인 / 노동의 새벽 외 1편 (0) | 2020.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