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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은주 시인 / 레밍 아나키스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5.

황은주 시인 / 레밍 아나키스트

 

 

  아나키스트의 정부는 중절모다

  그곳엔 깃발과 각료와 공관이 있다

 

  약도에서 주저를 찾는다

  삼거리에는 가게가 있고 주점이 있고 만화방이 있다

  삼거리에는 흙 묻은 바짓단이 있겠지

  주저하기 알맞은 곳  

 

  열시 방향의 화폐를 내고

  여섯시 방향의 담배를 사고

  그리고 두시 방향의 술을 마시면 되겠지  

   

  세 길이 맞닿은 곳에는 동그라미가 있다

  사라지거나 절벽이 되거나

  이정표들의 무덤이거나 원형 결투장이거나,

  복수를 등에 진 아나키스트들이 모여든다

 

  영역이 비만해진 뒤

  명령이 비루해진 뒤

  직선으로 돌진하는 레밍과

  우르르 레밍을 뒤쫓아 달리는

  레밍, 레밍들

 

  바다가 그리운 건 아니다

  약도에 직선의 끝은 없다

 

  자정을 지난 정부가 있다

  수억만 년 전부터 머릿속에 그려 있던 약도를 찾는다

  길이 있고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약도가 틀렸음이다

 

  삼거리에서 후훗,

  손바닥에 침을 뱉어 튕겨볼 일이다

  총성 하나를 미리 품어 볼 일이다

 

웹진 『시인광장』 2013년 6월호 발표

 

 


 

황은주 시인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 졸업. 2012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