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강인한 시인 / 꿩이 털 빠지면 저만 춥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5.

강인한 시인 / 꿩이 털 빠지면 저만 춥지

 

 

보아라, 짐의

일만 평 시름 위에 촘촘한 송곳으로 내리고 있는 비

오늘은 굳세게 검을 잡고

저들을 버히리라

가증스런 세 치 혓바닥을 함부로 놀려

제왕을 능멸하는 저 어리석은 자들에게

율법의 준엄함을 세워서 보이리로다

한 나라의 안위를 코 앞에 두고

어릿광대의 쓸개를 희롱하는 자들이여

억조 창생 앞에 겹겹 적막으로 몸을 두르고도

감출 수 없는 짐의 수고로움이야

몽매 무지한 저들이 어찌 짐작이나 하랴

짐이 한번 희다 하였으면

까마귀도 백 번 희어 마땅하거늘

작두 위에서 촛불 들고 춤추는

천한 목숨들이여

한 칼에 버히면 피는 흐르고

꿩이 털 빠지면 저만 춥지, 낄낄낄낄

검다 희다, 희다 검다, 말도 많구나

가을 들판에 서서

허공을 나는 참새에게 물어 보라

이 땅이 뉘 것이며

이 하늘이 뉘 것인가를.

 

우리 나라 날씨, 나남, 1986

 

 


 

 

강인한 시인 / 눈먼 사내

 

 

밤 물결이여.

밀감빛 노오란 등불이

풍금 소리처럼 새어 나오는

눈 내린 골목길을

시리우스의 별빛만한

외로움이 간다.

지난 가을 누이의 혼례식장에

가만히 켜졌던 작은 눈물

비늘로 반짝이며

오늘은 어느 집 창가에서

잠을 자려나

물결이여.

제 얼굴 밖에서 서성이는

겨울의 꿈이여.

 

우리 나라 날씨, 나남, 1986

 

 


 

강인한 시인

1944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동길. 전주고등학교를 거쳐 전북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이상기후』『불꽃』『전라도 시인』『우리나라 날씨』『칼레의 시민들』『황홀한 물살』『푸른 심연』『입술』 『강변북로』, 시선집 『어린 신에게』, 시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가 있다. 37년간 중고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2004년 2월 명예퇴직을 하였다. 1982년 전남문학상, 2010년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