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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수호 시인 / 이제 지겹다고 안 할게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7.

천수호 시인 / 이제 지겹다고 안 할게

 

 

  1.

 

  당신이 사랑이라는 말을 처음 시작할 때

  발에 걸리는 줄넘기 줄 같은 저 산은

  파도를 밑변으로 받치고 있었다

 

  당신이 손을 뻗어 저 산의 뒤쪽을 얘기할 때 나는

  무명 끈 잡아당기며 몸 속 파도에 퍼붓던 애초의 욕설과

  나지막한 봉분의 속삭임을 뒤섞고 있었다

  당신은 그렇게 왔고 또 그렇게 떠났다

 

  왔다고 하고 떠났다고 했지만

  그곳이란 원래 없는 것

  파도가 풀어내는 바다

 

  당신이 다시 온다면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해도 이제 지겹다고 안 할게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다 다르다고 생각할게

 

  갈매기가 한 쪽 발을 적실 때와

  통통배가 빠르게 지나갈 때의 파도가 다르듯이

 

  2.

 

  떠난 지 5개월이 지난 지금도

  누군가는 당신 조의금을 보내온다

  당신이 저 바닷물에 소금이 녹는 데 5개월이 걸린다고 했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어떻게 그렇게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건지

 

  바닷물이 소금이 되는 데 한나절이면 된다는 내 말에 코웃음 치며

  당신은 또 저 건너편 산 쪽으로 달려간다

  다시는 안 돌아올 기세로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파도의 겹겹, 또는 첩첩

  그 깊은 여울 속으로 당신이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들어가는 것을,

  마지막 호흡과 맥박과 혈압을,

  떨어지는 수치로만 지켜보면서

  바다가 가팔라진다

 

  터지는 파도, 먹는 파도, 뒹구는 파도, 놀라는 파도 사이로

  굵고도 붉은 당신이 진다.

 

웹진 『시인광장』 2015년 8월호 발표

 

 


 

천수호 시인

1964년 경북 영천에서 출생.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명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시집으로 『아주 붉은현기증』(민음사, 2009)와 『우울은 허밍』(문학동네, 2014)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명지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