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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안진 시인 / 만가(挽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7.

유안진 시인 / 만가(挽歌)

 

 

제일 먼 곳이

가장 가까워지는

가을 가을밤에는

먼 먼 사랑아

창 밖 풀벌레 소린 듯이

만가를 불러다오

 

깔멜 수도원 노원장 수녀님

하얀 속눈썹 마른 수풀 너머로

고여 파아란 호수 눈빛도

잠시 흔들리듯

나는 듣고 싶네

 

죽음을 무릅쓰고

피 흘리며 걸어가는

성난 짐승 같던 그 여름을

비 맞는 단풍처럼 울고 싶던 목청을

 

가을밤엔 소리 낮춰

조그맣게 불러다오

제일 먼 곳에서

눈 떠 들으리

강 건너 불빛처럼

나는 들으리.

 

월령가 쑥대머리, 문학사상사, 1990

 

 


 

 

유안진 시인 / 맨발

 

 

무엇을 신었어도

늘 맨발이었다

맨발처럼 민망스럽고

맨발처럼 당당했다

 

등뼈가 휘어지도록 반백 년을 걷고 걸어

닳고 닳은 발바닥은 못과 굳은 티눈

발톱은 잦아지고 발가락들 일그러져

그물 힘줄 앙상한 발등뿐인 내 두 발아

 

무엇을 신겨봐도

아직도 맨발이다

맨발처럼 시리다 저리다

맨발처럼 쥐가 난다.

 

구름의 땅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시와시학사, 1995

 


 

유안진 시인

1941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서울대 사대 및 동 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등단. 1970년 첫시집 『달하』를 간행한 이후 『물로 바람으로』(1975) 『월령가 쑥대머리』(1990), 『봄비 한 주머니』(2000) 등 10여 권의 시집과 시선집을 출간했고, 수필집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1988) 『축복을 웃도는 것』(1994) 등과 장편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1990) 『땡삐』(1994) 등의 작품이 있음.

그밖에 『한국의 전통 육아방식』(1987) 등 다수의 전공저서와 논문을 상재. 한국펜문학상(1996), 정지용문학상(1998), 월탄문학상(2000) 등을 수상.  현재 서울대 아동학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