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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안진 시인 / 병상(病床)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9.

유안진 시인 / 병상(病床)

 

 

겨울이여

소설 중의 기인 비극 소설이여

시방 세상은

하얀 시트 깔린 적막한 병상

그 위에 누인 내 몸

바싹 마른 겨울나무

 

무자비하게 무자비하게

흰 눈은 다시 덮여

세상은 절대의 죽음 빛깔뿐

영안실의 적막일 뿐

 

삶을 새롭게 탄생시켜주는

죽음은 얼마나 기막힌 축복인가

죽음 가까이 다가가 봄으로써

얼마나 그 얼마나 살고 싶어지는가

 

살고 싶어 들리는 아이 적의 먼 종소리

예배당 그 종소리에 일어나는 겨울나무

몇십 년 만에 모습 나타내는

희미한 꽃잎처럼

내년 봄엔 나 봄거리에 나서볼까.

 

월령가 쑥대머리, 문학사상사, 1990

 

 


 

 

유안진 시인 / 봄

 

 

저 쉬임 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홀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음이랴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각담을 기어오르는 봄햇살, 춘설(春雪)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 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 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랑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다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 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바꼭질 노니는 산골짜기에는 뻐국뻐벅국 사랑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럼증, 산 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홍빛 봄.

 

날개옷, 문학예술사, 1981

 


 

유안진 시인

1941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서울대 사대 및 동 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등단. 1970년 첫시집 『달하』를 간행한 이후 『물로 바람으로』(1975) 『월령가 쑥대머리』(1990), 『봄비 한 주머니』(2000) 등 10여 권의 시집과 시선집을 출간했고, 수필집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1988) 『축복을 웃도는 것』(1994) 등과 장편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1990) 『땡삐』(1994) 등의 작품이 있음.

그밖에 『한국의 전통 육아방식』(1987) 등 다수의 전공저서와 논문을 상재. 한국펜문학상(1996), 정지용문학상(1998), 월탄문학상(2000) 등을 수상.  현재 서울대 아동학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