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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시인 / 병상(病床)
겨울이여 소설 중의 기인 비극 소설이여 시방 세상은 하얀 시트 깔린 적막한 병상 그 위에 누인 내 몸 바싹 마른 겨울나무
무자비하게 무자비하게 흰 눈은 다시 덮여 세상은 절대의 죽음 빛깔뿐 영안실의 적막일 뿐
삶을 새롭게 탄생시켜주는 죽음은 얼마나 기막힌 축복인가 죽음 가까이 다가가 봄으로써 얼마나 그 얼마나 살고 싶어지는가
살고 싶어 들리는 아이 적의 먼 종소리 예배당 그 종소리에 일어나는 겨울나무 몇십 년 만에 모습 나타내는 희미한 꽃잎처럼 내년 봄엔 나 봄거리에 나서볼까.
월령가 쑥대머리, 문학사상사, 1990
유안진 시인 / 봄
저 쉬임 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홀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음이랴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각담을 기어오르는 봄햇살, 춘설(春雪)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 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 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랑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다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 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바꼭질 노니는 산골짜기에는 뻐국뻐벅국 사랑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럼증, 산 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홍빛 봄.
날개옷, 문학예술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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