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윤학 시인 / 어느 날 사월의 눈이 찍힌 사진들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9.

이윤학 시인 / 어느 날 사월의 눈이 찍힌 사진들

 

 

  어떤 작위의 세계*에 같이 들어갈 수 없는 우리가

  보리밭 탱자나무 울타리 밖 농로의 고랑을 따라 걸으며

  노래를 불렀다 이어 부른 노래의 끝에서 우리는 천 년보다

  오래 묵은 느티나무의 꺾이지 않은 下端部를

  느티나무의 끝까지 갔다 온 등나무의 몰락과

  푸석한 굵기를 보듬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천 년이 걸렸고 우리는 앞으로 천 년을 견딜 수 없었다

  태풍다운 태풍이 천 년 주기로 불어온대도

  녹은 눈이 속껍질을 불콰하게 붉혀도

  목을 조르는 잠이 찾아와 병실 침대보를 움켜잡았다

  침대 밖은 천 년 눈 내리는 낭떠러지가 되었으나

  우리는 커브길을 돌아 철길의 굴다리를 지나

  핸들과 바퀴가 빠진 자전거를 버리고 걸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들 간은 몇 개씩 녹아났는지

 

*정영문 소설

 

웹진 『시인광장』 2015년 10월호 발표

 

 


 

이윤학 시인

196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먼지의 집』,『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외에 다수 있음.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