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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노해 시인 / 지문을 부른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0.

박노해 시인 / 지문을 부른다

 

 

진눈깨비 속을

웅크려 헤쳐 나가며 작업시간에

가끔 이렇게 일보러 나오면

참말 좋겠다고 웃음 나누며

우리는 동회로 들어선다

 

초라한 스물 아홉 사내의

사진 껍질을 벗기며

가리봉동 공단에 묻힌 지가

어언 육년, 세월은 밤낮으로 흘러

뜻도 없이 죽음처럼 노동 속에 흘러

한번쯤은 똑같은 국민임을 확인하며

주민등록 경신을 한다

 

평생토록 죄진 적 없이

이 손으로 우리 식구 먹여 살리고

수출품을 생산해 온

검고 투박한 자랑스런 손을 들어

지문을 찍는다

없어, 선명하게

없어,

노동 속에 문드러져

너와 나 사람마다 다르다는

지문이 나오지를 않아

없어, 정 형도 이 형도 문 형도

사라져 버렸어

임석경찰은 화를 내도

긴 노동 속에

물 건너간 수출품 속에 묻혀

지문도, 청춘도, 존재마저

사라져 버렸나봐

 

몇 번이고 찍어 보다

끝내 지문이 나오지 않는 화공약품 공장

아가씨들은 끝내 울음이 북받치고

줄지어 나오는, 지문 나오지 않는 사람들끼리

우리는 존재조차 없어

강도질해도 흔적도 남지 않을거라며

정 형이 농지껄여도

더이상 아무도 웃지 않는다

 

지문 없는 우리들은

얼어붙은 침묵으로

똑같은 국민임을 되뇌이며

파편으로 내리꽂히는 진눈깨비 속을 헤쳐

공단 속으로 묻혀져 간다

선명하게 되살아날

지문을 부르며

노동자의 푸르른 생명을 부르며

되살아날

너와 나의 존재

노동자의 새봄을

부르며 부르며

진눈깨비 속으로,

타오르는 갈망으로 간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박노해 시인 / 통박

 

 

어느 놈이 커피 한잔 산다 할 때는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걸 안다

 

고상하신 양반이

부드러운 미소로 내등을 두드릴 땐

내게 무얼 원하는지 안다

 

별스런 대우와 칭찬에

허릴 굽신이며 감격해도

저들이 내게 무얼 노리는지 안다

 

우리들이 일어설 때

노사협조를 되뇌이며 물러서는

저 인자한 웃음 뒤의 음모와 칼날을

우리는 안다

 

유식하고 높은 양반들만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일찌기 세상바닥 뒹굴며

눈치밥을 익히며 헤아릴 수 없는 배신과 패배 속에

세상 살아가는 통박이 생기드만

 

세상엔 빡빡 기는 놈들 위에서

신선처럼 너울너울 나는 놈 따로 있어

날개 없이 기름바닥 기는 우리야

움츠리며 통박을 굴리며 살아가지만

통박이 구르다 보면

통박끼리 구르고 합쳐지다 보면

거대한 통박이 된다고

 

좆도 배운 것 없어도

돈날개 칼날개 달고 설치는 놈들이 무엇인지

이놈의 세상이 어찌된 세상인지

누구를 위한 세상인지

우리들 거대한 통박으로 안다

 

쓰라린 눈물과 억압과 패배 속에서

거대한 통박으로 구르고 부딪치고 합치면서

우리들의 통박은

점점 날카롭고 명확하게

가다듬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통박이 거대한 통박으로,

하나의 통박으로 뭉쳐지면서

노동하는 우리들의 새날을 향하여

이놈의 세상을 굴려갈 것이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박노해 시인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고흥, 벌교에서 자랐다. 16세 때 상경하여 낮에는 노동자로 생활하고 밤에는 선린상고(야간)를 다녔다. 1984년 스물일곱 나이에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다. 1989년, 분단 이후 사회주의를 처음 공개적으로 천명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했다. 7년여의 수배생활 끝에 1991년 체포, 참혹한 고문 후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옥중에서 1993년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과 1997년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1998년 7년 6개월의 수감 끝에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