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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 / 지문을 부른다
진눈깨비 속을 웅크려 헤쳐 나가며 작업시간에 가끔 이렇게 일보러 나오면 참말 좋겠다고 웃음 나누며 우리는 동회로 들어선다
초라한 스물 아홉 사내의 사진 껍질을 벗기며 가리봉동 공단에 묻힌 지가 어언 육년, 세월은 밤낮으로 흘러 뜻도 없이 죽음처럼 노동 속에 흘러 한번쯤은 똑같은 국민임을 확인하며 주민등록 경신을 한다
평생토록 죄진 적 없이 이 손으로 우리 식구 먹여 살리고 수출품을 생산해 온 검고 투박한 자랑스런 손을 들어 지문을 찍는다 아 없어, 선명하게 없어, 노동 속에 문드러져 너와 나 사람마다 다르다는 지문이 나오지를 않아 없어, 정 형도 이 형도 문 형도 사라져 버렸어 임석경찰은 화를 내도 긴 노동 속에 물 건너간 수출품 속에 묻혀 지문도, 청춘도, 존재마저 사라져 버렸나봐
몇 번이고 찍어 보다 끝내 지문이 나오지 않는 화공약품 공장 아가씨들은 끝내 울음이 북받치고 줄지어 나오는, 지문 나오지 않는 사람들끼리 우리는 존재조차 없어 강도질해도 흔적도 남지 않을거라며 정 형이 농지껄여도 더이상 아무도 웃지 않는다
지문 없는 우리들은 얼어붙은 침묵으로 똑같은 국민임을 되뇌이며 파편으로 내리꽂히는 진눈깨비 속을 헤쳐 공단 속으로 묻혀져 간다 선명하게 되살아날 지문을 부르며 노동자의 푸르른 생명을 부르며 되살아날 너와 나의 존재 노동자의 새봄을 부르며 부르며 진눈깨비 속으로, 타오르는 갈망으로 간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박노해 시인 / 통박
어느 놈이 커피 한잔 산다 할 때는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걸 안다
고상하신 양반이 부드러운 미소로 내등을 두드릴 땐 내게 무얼 원하는지 안다
별스런 대우와 칭찬에 허릴 굽신이며 감격해도 저들이 내게 무얼 노리는지 안다
우리들이 일어설 때 노사협조를 되뇌이며 물러서는 저 인자한 웃음 뒤의 음모와 칼날을 우리는 안다
유식하고 높은 양반들만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일찌기 세상바닥 뒹굴며 눈치밥을 익히며 헤아릴 수 없는 배신과 패배 속에 세상 살아가는 통박이 생기드만
세상엔 빡빡 기는 놈들 위에서 신선처럼 너울너울 나는 놈 따로 있어 날개 없이 기름바닥 기는 우리야 움츠리며 통박을 굴리며 살아가지만 통박이 구르다 보면 통박끼리 구르고 합쳐지다 보면 거대한 통박이 된다고
좆도 배운 것 없어도 돈날개 칼날개 달고 설치는 놈들이 무엇인지 이놈의 세상이 어찌된 세상인지 누구를 위한 세상인지 우리들 거대한 통박으로 안다
쓰라린 눈물과 억압과 패배 속에서 거대한 통박으로 구르고 부딪치고 합치면서 우리들의 통박은 점점 날카롭고 명확하게 가다듬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통박이 거대한 통박으로, 하나의 통박으로 뭉쳐지면서 노동하는 우리들의 새날을 향하여 이놈의 세상을 굴려갈 것이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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