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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광 시인 / 한 점 背後도 없이 나무는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0.

이영광 시인 / 한 점 背後도 없이 나무는

 

 

  주먹 쥔 손을 내밀고 나무는

  고요히 서 있다

  쉼 없이 멈춰 있다

  싸우지 않는 싸움꾼처럼

 

  잔매가 쌓이듯 마른 몸에 내리는 눈발을

  삭풍이 달궈놓은,

  오징어 튀김 같은 팔뚝에 받는다

 

  싸움꾼은 저렇게 무방비 상태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싸움꾼은 저렇게 싸우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저렇게 싸워야 한다

 

  나무는 빈 들판에 서 있다

  나무는 대지를 섬광처럼 한 바퀴 돌고 와서 고요하다

  뿌리째 떠돌아도 제 자리에서

  폭풍처럼 가만히 숨 쉰다

 

  나무의 적은 얼굴을 드러낸 적 없는 勢力

  대지는 이글거리는 뿌리들을 천천히 비끄러맨다

  바람은 잡념의 가지들을 조각조각 부러뜨린다

  나무의 정권들이 나무 속으로 들어간다

  나무는 오직 나무에게로 사라진다

 

  한 점 背後도 없이 나무는

  삭풍과 눈보라와 흙먼지의 백만 대군을,

  백만 대군을 호령하는 안 보이는 지평선을

  한 자루 장창으로 막아 선다

 

웹진 『시인광장』 2008년 봄호 발표

 

 


 

이영광 시인

1967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고려대 영문과 및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빙폭〉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직선 위에서 떨다』(창비, 2003)와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2007),『아픈 천국』(창비, 2010), 『나무는 간다』(창비, 2013)가 있음. 2008년 제8회 노작문학상, 2011년 제11회 지훈상, 2011년 미당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