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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인 / 눈보라
원효로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등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都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1
황지우 시인 / 동사(動詞)
한다. 시작한다. 움직이기 시작한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소리난다. 울린다. 엎드린다. 연락한다. 포위한다. 좁힌다. 맞힌다. 맞는다. 맞힌다. 흘린다. 흐른다. 뚫린다. 넘어진다. 부러진다. 날아간다. 거꾸러진다. 패인다. 이그러진다. 떨려나간다. 뻗는다. 벌린다. 나가떨어진다. 떤다. 찢어진다. 갈라진다. 뽀개진다. 잘린다. 튄다. 튀어나가 붙는다. 금간다. 벌어진다. 깨진다. 부서진다. 무너진다. 붙든다. 깔린다. 긴다. 기어나간다. 붙들린다. 손 올린다. 묶인다. 간다. 끌려간다. 아, 이제다 가는구나. 어느 황토 구덕에 잠들까. 눈감는다. 눈뜬다. 살아 있다. 있다. 있다. 있다. 살아 있다. 산다.
나는 너다, 문학과지성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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