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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시인 / 정오(正午)
학생회관 앞 자유의 광장에선 노랑색 빨강색 깃발이 올랐다 확성기의 숨소리는 거칠어지고 점심시간에 맞춰 모두들 모여들었다 구호는 깃발 끝에서 펄럭이고 주먹은 하늘과 땅 사이를 가로질렀다 게시판마다 용트림하는 대자보 하늘 끝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일기예보는 적중했다 매서운 빗줄기가 정오를 강타하며 쿵쿵쿵 대지를 애써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대지는 까딱도 않는데 대지는 눈깜짝도 않는데.
萍 문학세계사, 1988
허형만 시인 / 폭풍
폭풍이 휘몰아치니 커다란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자빠지고 더 커다란 나무들은 가지 줄기들이 꺾이운 채 허우적이고 있었다 폭풍이 한번 휘몰아치니 높은 곳의 낡은 판자지붕이 날아가고 더 높은 곳의 허름한 담장은 무너져내렸다 폭풍이 휘몰아치니 길 가던 어린 아이가 날으는 유리에 찔리고 산에 올랐던 대학생이 수몰되었다 폭풍이 한번 휘몰아치니 하늘은 붉으락푸르락 노해서 요동치고 땅은 찍소리도 못한 채 벼들만 엎어졌다 폭풍이 폭풍이 천지를 휘몰아치는 날 그러나 나는 너무도 덤덤했다 그리고 짤막한 일기를 썼다 아직은 불혹의 나이에 이보다 더한 폭풍 얼마나 겪을 것인가 하고.
萍 문학세계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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