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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형만 시인 / 정오(正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0.

허형만 시인 / 정오(正午)

 

 

학생회관 앞 자유의 광장에선

노랑색 빨강색 깃발이 올랐다

확성기의 숨소리는 거칠어지고

점심시간에 맞춰 모두들 모여들었다

구호는 깃발 끝에서 펄럭이고

주먹은 하늘과 땅 사이를 가로질렀다

게시판마다 용트림하는 대자보

하늘 끝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일기예보는 적중했다

매서운 빗줄기가

정오를 강타하며

쿵쿵쿵 대지를 애써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대지는 까딱도 않는데

대지는 눈깜짝도 않는데.

 

萍 문학세계사, 1988

 

 


 

 

허형만 시인 / 폭풍

 

 

폭풍이 휘몰아치니

커다란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자빠지고

더 커다란 나무들은

가지 줄기들이 꺾이운 채 허우적이고 있었다

폭풍이 한번 휘몰아치니

높은 곳의 낡은 판자지붕이 날아가고

더 높은 곳의 허름한 담장은 무너져내렸다

폭풍이 휘몰아치니

길 가던 어린 아이가 날으는 유리에 찔리고

산에 올랐던 대학생이 수몰되었다

폭풍이 한번 휘몰아치니

하늘은 붉으락푸르락 노해서 요동치고

땅은 찍소리도 못한 채 벼들만 엎어졌다

폭풍이 폭풍이 천지를 휘몰아치는 날

그러나 나는 너무도 덤덤했다

그리고 짤막한 일기를 썼다

아직은 불혹의 나이에

이보다 더한 폭풍 얼마나 겪을 것인가 하고.

 

萍 문학세계사, 1988

 

 


 

허형만 시인

1945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 중앙대 국문과와  성신여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73년《월간문학》을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청명』, 『풀잎이 하나님에게』, 『모기장을 걷는다』, 『입맞추기』, 『이 어둠속에 쭈그려 앉아』, 『공초』, 『진달래 산천』,  『풀무치는무기가 없다』 등과 시선집으로 『새벽』, 활판시선집 『그늘』 등과 평론집으로 『시와 역사 인식』, 『영랑 김윤식 연구』 등이 있음.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한성기문학상, 전라남도 문화상, 우리문학작품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목포대학교 인문과학대학장 겸 교육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