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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지우 시인 / 바퀴벌레는 바퀴가 없다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4.

황지우 시인 / 바퀴벌레는 바퀴가 없다

 

 

"짐승 같은 놈!" (이것은 아내가 한 말)

"바퀴벌레도 즘생이야, 여보." (이것은 내가 한 말)

그러나 바퀴벌레는 근엄한 검정색 예복, 아니 정복을 입었다.

무슨 일을 감행하는 집단들처럼

틈틈에 잠복해 있다가

때가 되면 기어나와, "맞어",

기어온다.

"짜식들, 기어나오긴 왜 기어나와?"

기어나와,

넘어서는 안 될 선(線)을 넘어서

그리고 한번 무너진 그 길을 따라

자꾸 자꾸 기어 나온다.

식생활(食生活)에서 성생활(性生活)에 이르기까지

나의 사생활(私生活) 전역에 투입되어,

"여보, 바퀴벌레 때문에 못 살겠어요.

우리 이살 가든가 이민을 가든가 해야지."

비닐 장판을 열면 겨우내 새끼들을 수두룩수두룩 까 놓고

이것들은 생명체일까, 병원균일까?

개체일까, 집단일까?

도무지. "이놈들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수채 구멍 속에서, 구정물 찌꺼기통에서

벽으로, 찬장 그릇 속으로, 안방으로, 책장 사이로, 이불 밑으로.

어쩌면 우리가 잠든 새 콧구멍  속으로, 머리칼 속으로, 꿈꾸는 송과선(松果腺)에까지

공룡 크기만큼 확대되어 엄습해 오는

이 야간 침입자들.

어느새 우리와 공생공사(共生共死)하자는 듯,

어느새 묵인된 이 범법자들.

오줌 누러 불을 켜면, 화다닥, 동작 그만!

들킨 바퀴벌레는 젖은 세멘트 벽에 붙어서,

그놈은 그놈대로 비상을 걸고, 부지런히 더듬이를 돌려대며

나의 접근을 관찰, 경계태세에 들어간다.

그놈은 지금 그놈의 사선(死線)에 엎드려 있다.

그 사선은 나의 사선이다. "이번이 기회야.

놓쳐선 안 돼." 여차하면 이놈은 눈 깜짝할 사이에

틈 속으로 매복해 버린다.

"죽여요.. 죽여 !" : 아내도 마루 끝에서 소리친다.

짠― 긴장 : "이놈, 우리 현세(現世)의 사생활을 분탕칠하는

이 더러운 놈, 네놈의 그 더러운 , 그 지상에서의 몸을

죽여 주마. 깨끗한 몸으로 교환하여 다시 태어나거라."

중얼거리는 내 마음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하는

이놈을 갖다가, 슬리퍼로, 그냥,

 

딱!

 

(쳤다)

(나는 죽였다)

 

뱃때기가 터져나와, 새하얀 피 같은 이물질을,

내장(內臟)인지, 지놈이 처먹은 밥인지, 를 내놓고

그의 더듬이를 여러  번 흔들며, 그의 다족을  흔들며(즉, 발버둥치며), 그러나 무성(無聲)으로

죽어 간다.

죽여 놓고도 아내와 나는 끔찍해 한다.

그리고 즐겁다.

바퀴벌레는 바퀴가 없다 :

수레를 끌지 않는다, 쌍 !

 

餠煎こすシ觀壙  봄 ― 나무에로, 민음사, 1985

 

 


 

 

황지우(黃芝雨, 1952 ~ ) 시인

본명은 황재우. 1972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 1973년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강제입영 당하였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1985년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91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