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하림 시인 / 겨울 초상화(肖像畵)
1
우리 어머니는 트럭을 타고 강진이네 해남이네 고훙이네로 다니며 쌀을 사다가 목포에다 팔았다. 과수댁인 어머니는 새벽 일찍 사립을 나서서 하룻밤 내지 이틀밤을 객지에서 밥먹고 잠자고 나무토막처럼 지쳐서 돌아왔는데, 그때는 그 밤들과 싸우고 쌀과 싸우고 남정네들과 무지무지 싸웠다고 한다. 싸우다 지치면 영산강으로 가 얼굴 씻으며 꺼이꺼이 울었다고 한다. 울음에 갈대들이 부드러이 부드러이 흔들리면서 화답해주고 달과 별도 얼굴을 쓸어주고 가슴과 엉덩이도 쓸어주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어머니는 노상 우리에게 우리의 맹세라도 하듯 들려주었다. 그런 어머니도 이제 가고, 그녀가 걷던 어둠의 강을 나는 걸으며 본다. 천년을 흘러도 흐름으로 있을 강을 보면서, 어머니여, 당신도 물빛 풀이나 돌멩이나 깨진 항아리, 풍뎅이 같은 것으로 언제까지 남아 있으시렵니까. 오늘은 저와 같이 강을 끼고 강을 보면서 길을 걷지 않으시렵니까
2
어머니가 장사가신 날은 키 작은 누이가 집안 살림을 했다 누이는 질그릇처럼 웅크리고, 쌀겨를 아궁이에 넣고, 풀무를 돌리고 숨을 죽였다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누이의 침묵 들으며, 참을 수 없을 적엔 부엌문을 박차고 나갔다 항아리엔 가득가득 어둠이 차고, 독(毒)이 차고, 식구들은 독(毒) 마시며 감정 죽이고, 떨고 있었다
3
그해도 다 간 날 놀라운 일이 찾아왔습니다
어머니가 장삿길에서 돌아온 지 서너덧 날 뒤 눈에 불을 쓰고 웬 아주머니가 득달같이 문을 차고 들이닥쳤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어머니는 돌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고 우리는 어머니를 보고 있었습니다 서방 내노랑께 서방 내노랑께 소리소리 지르던 여인의 목소리가 아직도 직사 광선처럼 선명합니다 그로부터 우리집은 안방 부엌 마루 마당 할것없이 냉전이 벌어졌습니다 한편은 어머니였고 한편은 누이였습니다 나는 어느 정도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누이는 완강해서, 나는 누이를 편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냉전은 겨울 내내 혹한처럼 계속되다가 봄과 함께 풀렸으나 예전 같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막내를 싸고돌았고 누이는 밖으로 나돌았습니다 그런지 몇 해째 누이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집을 떠났습니다 어둠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5
적의와 연민으로 꽉찬 길을 오늘 나는 절뚝이며 갑니다 어머니가 내동댕이친 길을 갑니다 쓰러져도 쓰러져도 일어나 갑니다 아아, 내 어머니! 어둠 속에 내가 있으면 모습을 보이는, 그리고 하던 일 멈추고 하나도 이상스럽지 않게, 사랑이 많이 남은 가슴으로 껴안아주는, 당신은 부서져도 부서져도 고통의 파편으로 살아, 고통의 웃음짓습니다 고통의 별바다 같습니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예현연 시인 / 생환(生還) (0) | 2020.01.14 |
|---|---|
| 최승호 시인 / 꽁한 인간 혹은 변기의 생 외 1편 (0) | 2020.01.14 |
| 신달자 시인 / 곡선(曲線) (0) | 2020.01.14 |
| 정호승 시인 / 개망초꽃 외 1편 (0) | 2020.01.14 |
| 오은 시인 / 팀 (0) | 2020.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