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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시인 / 꽁한 인간 혹은 변기의 생
나에게서 인간이란 이름이 떨어져나간 지 이미 오래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흩어지면 여럿이고 뭉쳐져 있어 하나인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왜 날 이렇게 만들어놨어 난 널 해(害)치지 않았는데 왜 날 이렇게 똥덩이같이 만들어놨어, 그리고도 넌 모자라 자꾸 내 몸을 휘젓고 있지 조금씩 떠밀려 가는 이 느낌 이제 나는 하찮고 더럽다 흩어지는 내 조각들 보면서 끈적하게 붙어 있으려 해도 이렇게 강제로 떠밀려 가는 변기(便器)의 생(生),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나는 숨을 쉰다
신기해라 나는 멎지도 않고 숨을 쉰다 내가 곤히 잠잘 때에도 배를 들썩이며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숨구멍이 많은 잎사귀들과 늙은 지구 덩어리와 움직이는 은하수의 모든 별들과 함께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대낮이면 황소와 태양과 날아 오르는 날개들과 물방울과 장수하늘소와 함께 뭉게구름과 낮달과 함께 나는 숨을 쉰다 인간의 숨소리가 작아지는 날들 속에 자라나는 쇠의 소리 관청의 스피커 소리가 점점 커지는 날들 속에
답답해라 나는 숨을 쉰다 튼튼한 기관지도 없다 폐활량도 크지 않고 가슴을 열어 갈아끼울 싱싱한 허파도 없다
산소를 실컷 마시지 못해 허공에서 입이 커다랗게 벌어지는 물고기처럼 징역에 지친 늙은 죄수처럼 때때로 헐떡이고 연거푸 음침한 기침을 하면서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그리고 움직이는 은하수의 모든 별들과 함께 죽어서도 나는 숨 쉴 것이다
灼晩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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