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경림 시인 / 갈구렁달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 갈구렁달: 황해도, 충청도 바닷가에서 쪽박같이 쪼그라든 달을 말함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신경림 시인 / 갈 길
녹슨 삽과 괭이를 들고 모였다 달빛이 환한 가마니 창고 뒷수풀 뉘우치고 그리고 다시 맹세하다가 어깨를 끼어 보고 비로소 갈 길을 안다 녹슨 삽과 괭이도 버렸다 읍내로 가는 자갈 깔린 샛길 빈 주먹과 뜨거운 숨결만 가지고 모였다 아우성과 노랫소리만 가지고 모였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강(江)
빗줄기가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진흙 속에 꽂히고 있다 아이들이 빗줄기를 피하고 있다 울면서 강물 속을 떠돌고 있다
강물은 그 울음소리를 잊었을까 총소리와 아우성소리를 잊었을까 조그만 주먹과 맨발들을 잊었을까
바람이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강물 위를 맴돌고 있다 아이들이 바람을 따라 헤매고 있다 울면서 빗발 속을 헤매고 있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황지우 시인 / 박쥐 (0) | 2020.01.15 |
|---|---|
| 심보선 시인 / 정체 모를 말 (0) | 2020.01.14 |
| 예현연 시인 / 생환(生還) (0) | 2020.01.14 |
| 최승호 시인 / 꽁한 인간 혹은 변기의 생 외 1편 (0) | 2020.01.14 |
| 최하림 시인 / 겨울 초상화(肖像畵) (0) | 2020.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