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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갈구렁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4.

신경림 시인 / 갈구렁달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 갈구렁달: 황해도, 충청도 바닷가에서 쪽박같이 쪼그라든 달을 말함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신경림 시인 / 갈 길

 

 

녹슨 삽과 괭이를 들고 모였다

달빛이 환한 가마니 창고 뒷수풀

뉘우치고 그리고 다시 맹세하다가

어깨를 끼어 보고 비로소 갈 길을 안다

녹슨 삽과 괭이도 버렸다

읍내로 가는 자갈 깔린 샛길

빈 주먹과 뜨거운 숨결만 가지고 모였다

아우성과 노랫소리만 가지고 모였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강(江)

 

 

빗줄기가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진흙 속에 꽂히고 있다

아이들이 빗줄기를 피하고 있다

울면서 강물 속을 떠돌고 있다

 

강물은 그 울음소리를 잊었을까

총소리와 아우성소리를 잊었을까

조그만 주먹과 맨발들을 잊었을까  

 

바람이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강물 위를 맴돌고 있다

아이들이 바람을 따라 헤매고 있다

울면서 빗발 속을 헤매고 있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