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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보선 시인 / 정체 모를 말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4.

심보선 시인 / 정체 모를 말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했다.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은 어른들과

  태어나자마자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아이들.

  누군가 그 말을 할 때는

  더 의로운 누군가가 옆에서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보라! 태양과 깃발로 완성되는 한낮이도다!

  사람들은 그러고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뭐라고? 누가 방금 뭐라고 했지?

  주위를 둘러보지만

  입술은 닫혔고

  이슬은 말랐고

  꽃은 시들고

  빛은 꺼졌다.

  사람들은 누군가 잔기침을 한 것뿐이라고.

  머릿속의 게으른 생각보다

  몸속을 휘젓고 다니는

  바람의 발굽이 한발 더 앞섰던 거라고.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

  방금 그 말을 한 사람이

  침묵의 열쇠로

  슬픔의 돌무덤을 열고 들어가

  그 안에서 홀로

  부스러지며 사위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웹진 『시인광장』 2010년 7월호 발표

 

 


 

심보선 시인

1970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및 同 대학원, 컬럼비아 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졸업.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경〉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2008)와 『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3)이 있음. 2011년 제4회 시인광장 시문학상과 동년 제11회 노작문학상 수상. 현재〈21세기 전망〉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