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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현숙 시인 / 목련은 흰피 동물이다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6.

손현숙 시인 / 목련은 흰피 동물이다

 

 

  악마의 마을에서 방금 도망쳐 나온 흰피 동물이다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때로는 달빛으로 양식을 대신하며

  그는 마당 안쪽을 시퍼렇게 물들였다

 

  그가 잠들었던 북쪽 방에는 볕도 들지 않았다

  밤에도 흰 그늘이 소복했다

  침묵이 어둠으로 가라앉던

  그곳에 가끔씩 소리가 찾아오곤 했는데

  태엽만 감아주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오르골 인형이

  소문을 끌고 골목 안을 쓸고 다녔다

 

  제 스스로가 부적이 되어 액막이처럼

  지나가는 바람에도 몸을 비틀던

  그는 모질게 주위를 물리쳤던 상처족

  햇살이 솜털로 가느다랗게 일어서는 오후

  등짐 하나 달랑 매고 우리 집 대문을 밀고 들어섰던가

 

  뱃속에 아기를 품었던 거다

  욕망을 하면 쇼크가 오는 슬픈 짐승

  한사코 북쪽으로만 꽃망울을 맺었다

  헛기침처럼 오는 발자국에 꽃 모가지 떨구면서

  빈 가지 움켜쥔 손 혼자서도 떨었다

 

  그것은 소리의 향을 밟고 오는 통증

  내장 환하게 흰 피로 가득 채운 넓고 하얀 꽃이파리

  유빙처럼 흘러왔다 떠나버렸던 봄밤,

  길목 어디쯤에서 한번은

  만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웹진 『시인광장』 2016년 2월호 발표

 

 


 

손현숙 시인

서울에서 출생. 1999년 《현대시학》에 <꽃터진다, 도망가자> 외 9편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너를 훔친다』(문학사상사, 2002)와 『손』(문학세계사, 2011)와 『경계의 도시. 공저』(경기문화재단, 오두막, 2015) 그리고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현암사, 2005)와 『나는 사랑입니다』(넥서스, 2012)가 있음. '국풍' 사진공모 수상,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수상. 2002년과 2005년 문화예술위원회 진흥기금 수혜. 2010년 서울문화재단 기금 수혜. 2015년 경기문화재단 기금 수혜. 경기일보 오피니언 컬럼 필진.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신구대학 사진과 졸업. 고려대학교 문학 석사.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