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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달자 시인 / 다만 하나의 빛깔로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6.

신달자 시인 / 다만 하나의 빛깔로

 

 

백지에 동그라미 그리면

그 안에

내 세상이 있다

 

조금 비뚤어진 원 안에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것은

하나의 빛깔로 움터오는

새싹인

아직 이름없는 나의 세상

 

마흔 넘어도

두려움 없이 넓은 공간에 있을 수 없어

작은 동그라미 그리고 들어서면

아 드디어

여린 뿌리를 내리고

다만 하나의 빛깔로 떠오르는

나의 세상

 

혼탁한 거미줄과

그 뒤의 안개를 거두어 내고

가파른 물길 같은

어둠을 헤엄쳐온 발 끝에

새벽 5시의 이슬이 터지는

순간에 접하는 나의 세상

 

살갗을 찢는 포만의 욕구

자생하여 날개를 젖던

앓던 것들을 가라앉히기 위해

전신으로 한뼘씩 줄여

동그라미 그리면

동그라미 그리면

한점 점으로 찍히는

단호한 집중

 

아직 이름없는 새싹인

자궁 속의 태아처럼

이제 분명한 성(性)으로 자리잡는

나의 세상이 있다

 

다만 하나의 빛깔로, 문학사상사, 1987

 

 


 

신달자(愼達子, 1943~ ) 시인

경남 거창에서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국문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72년 《현대문학》을 통해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봉헌문자』, 『겨울축제』, 『모순의 방』, 『시간과의 동행』, 『아버지의 빛』, 『아가』, 『아버지의 빛』 등과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외에 산문집 『백치애인』, 『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 『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 』등이 있음. 1964년 여상 신인여류문학상, 1989년 대한민국문학상, 1998년 '향문화대상, 2001년 시와 시학상, 2004년 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