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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꼽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6.

정호승 시인 / 꼽추

 

 

마침내 아침이 오면

너의 등에는 장미가 피고

나의 등에는 버섯이 핀다.

 

너는 등에 푸른 산을 가꾸고

나는 등에 나의 무덤 지고 다닌다.

 

너는 금은방에 빛나는 보석을 사고

나는 풀잎 위에 구르는 이슬을 딴다.

 

너는 어머니를 위하여 길을 쓸지만

나는 아직 누굴 위해 길을 쓸 줄 모른다.

 

너는 피와 눈물을 훔치지 않고

어린 걸인들을 위하여 밥을 데운다.

 

아내와 아이들의 웃음을 먹고

네가 길을 떠나면 머나먼 산길.

 

나는 집 앞 골목길도 벗어나지 못하고

우는 아이 울음도 닦아주지 못한다.

 

너의 등뒤로 숨을 자는 다 숨고

너의 피리 소리에 춤출 자는 다 춤춘다.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정호승 시인 / 너의 무덤 앞에서

 

 

이 땅을 걸으면

오늘도 내 발목엔

너의 쇠사슬이 채었나보다

 

이 하늘을 바라보면

오늘도 내 두 눈엔

너의 화살이 날아와 박혔나보다

 

아들이 아버지를 묻어주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묻어주는 오늘밤

 

싸락눈 맞으며 산새가 되어

어느 하늘 산길 가는

너를 좇으면

 

눈발이 날리는

산모퉁이 하늘가로

울며 떠나가는 네가 보인다

 

새벽편지, 민음사, 1987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