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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하림 시인 / 나는 선(禪)맛 느낀다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8.

최하림 시인 / 나는 선(禪)맛 느낀다

 

 

후두둑, 후두둑,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면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가지각색 나뭇잎들이여!

나뭇잎의 비유여!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너희들은 광주리를 들고 떼몰려온다

아이들을 데불고 오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이는 장대를 들고

마음의 안정이 떨어지도록

사정없이 가지를 난타한다

후두둑 후두둑 이파리들이 비 오듯 한다

형형색색으로 얼룩진 땅에서

이파리는 떨어지는 대로 쌓이고

이파리는 눈비에 부스러지면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더욱 세차게 우듬지를 흔들어라!

수동적인 땅의 수동적인 기다림 속으로

들어가거라! 그곳에는 밤의 가슴이 푸들푸들

떨고, 다람쥐 딱따구리가 새의 날갯짓보다

가벼운 발자국을 남기며 잡목 새로 사라져갈

것이다 아직도 색소가 많이 남은 잎들이

연둣빛으로 빛나고, 이끼가 숨소리 죽이고,

바람과 눈비도 무엇인가를

소곤거리며,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말할 것이다

이 긍정적인 소리들은 이대토록 내가 모르던 것!

계곡에서 저녁 안개 올라온다

나무들 짐승들이 모습을 숨긴다

들어가거라! 산속 고요 속으로

풋풋한 흙의 향기 나무 향기

존재하는 것들의 겨울 꿈꾸기

나는 산속에 있다

나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다른 것들을

생각한다 순간

나는 놀란다

나는 선(禪)맛 느낀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崔夏林,1939.3.7 ~ 2010,4.22]  시인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침묵의 빛』 그리고 시전집 『최하림 시 전집』 등이 있음 그 밖에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자유인의 초상』과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냄.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