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승호 시인 / 무인칭 대 무인칭
무덤 속의 무인칭들은 갈수록 썩으면서 끙끙거리기는 하지만 밖으로 기어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누가 나갔다가 `아 난 풀려났어, 혼 나갈 뻔했지' 그리곤 무덤으로 들어온다 울타리들이 무덤을 삥 둘러싸고 행진하고 있다 울타리 너머에 또 울타리들이 넓게도 행진하고 있고 울타리 너머 울타리, 그 너머 울타리들이 씩씩하게 행진하고 있다 발효하는 시체의 냄새, 아내는 설거지통 속의 그릇들을 씻고 있고 남편은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신문을 방바닥에 펼쳐 놓고 숨은그림찾기를 하고 있다. 국어책을 큰 목소리로 읽는 아들의 발성연습, 딸애의 가계부 정리, 산수를 잘 해야지, 텔레비에선 뉴스 시간에 복권당첨 번호를 보도한다. 발효하는 시체의 냄새 속에 이렇게 모범 가정이 무덤 속에 여러 개의 관처럼 많을 줄이야.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무인칭의 죽음
뒷간에서 애를 낳고 애가 울자 애가 무서워서 얼른 얼굴을 손으로 덮어 죽인 미혼모가 고발하고 손가락질하는 동네사람들 곁을 떠나 이제는 큰 망치 든 안짱다리 늙은 판사 앞으로 가고 있다
그 죽은 핏덩어리를 뭐라고 불러야 서기(書記)가 받아 쓰겠는지 나오자마자 몸 나온 줄 모르고 죽었으니 생일(生日)이 바로 기일(忌日)이다 변기통에 붉은 울음뿐인 생애, 혹 살았더라면 큰 도적이나 대시인이 되었을지 그 누구도 점칠 수 없는
그러나 치욕적인 시(詩) 한 편 안 쓰고 깨끗이 갔다 세발자전거 한 번 못 타고 피라미 한 마리 안 죽이고 갔다. 단 석 줄의 묘비명으로 그 핏덩어리를 기념하자
거기에서 떨어져 변기통에 울다가 거기에 잠들었다.
灼晩 미래사, 1991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신경림 시인 / 그날 외 2편 (0) | 2020.01.18 |
|---|---|
| 류인서 시인 / 침묵수도원* (0) | 2020.01.18 |
| 최하림 시인 / 나는 선(禪)맛 느낀다 (0) | 2020.01.18 |
| 신달자 시인 / 미로(迷路) (0) | 2020.01.18 |
| 문정희 시인 / 눈 한 말 (0) | 2020.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