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승호 시인 / 무인칭 대 무인칭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8.

최승호 시인 / 무인칭 대 무인칭

 

 

무덤 속의 무인칭들은 갈수록 썩으면서

끙끙거리기는 하지만

밖으로 기어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누가 나갔다가 `아 난 풀려났어, 혼 나갈 뻔했지'

그리곤 무덤으로 들어온다

울타리들이 무덤을 삥 둘러싸고 행진하고 있다

울타리 너머에 또 울타리들이 넓게도 행진하고 있고

울타리 너머 울타리, 그 너머 울타리들이 씩씩하게 행진하고 있다

발효하는 시체의 냄새, 아내는 설거지통 속의 그릇들을 씻고 있고

남편은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신문을 방바닥에 펼쳐 놓고

숨은그림찾기를 하고 있다. 국어책을 큰 목소리로 읽는

아들의 발성연습, 딸애의 가계부 정리, 산수를 잘 해야지,

텔레비에선 뉴스 시간에 복권당첨 번호를 보도한다.

발효하는 시체의 냄새 속에 이렇게

모범 가정이 무덤 속에 여러 개의 관처럼 많을 줄이야.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무인칭의 죽음

 

 

뒷간에서 애를 낳고

애가 울자 애가 무서워서

얼른 얼굴을 손으로 덮어 죽인 미혼모가

고발하고 손가락질하는 동네사람들 곁을 떠나

이제는 큰 망치 든

안짱다리 늙은 판사 앞으로 가고 있다

 

그 죽은 핏덩어리를

뭐라고 불러야 서기(書記)가 받아 쓰겠는지

나오자마자 몸 나온 줄 모르고 죽었으니

생일(生日)이 바로 기일(忌日)이다

변기통에 붉은

울음뿐인 생애,

혹 살았더라면 큰 도적이나 대시인이 되었을지

그 누구도 점칠 수 없는

 

그러나 치욕적인 시(詩) 한 편 안 쓰고 깨끗이 갔다

세발자전거 한 번 못 타고

피라미 한 마리 안 죽이고 갔다.

단 석 줄의 묘비명으로 그 핏덩어리를 기념하자

 

거기에서 떨어져

변기통에 울다가

거기에 잠들었다.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서울대학교와 同 대학원 졸업.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과 산문집으로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과 그림책으로 『누가 웃었니?』, 『이상한 집』이 있음.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