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류인서 시인 / 침묵수도원*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8.

류인서 시인 / 침묵수도원*

 

 

  침묵은 귀밝은 늙은 동물,

  놀랍게도 그 굽은 등을 지반 삼아 집 짓는 사람들을 보았다

  선잠 든 침묵의 귓불을 건들지 않으려 가만가만 시간을 벽돌 쌓으며 걷는

  젊은 수도사의 조심성 많은 뒷모습을 보았다

 

  가을겨울가을겨울 더 깊어지는 회랑(回廊)이 침묵의 방벽이 되어주는 말없음의 시간을 보았다

  삼엄한 침묵의 경계(警戒)를 피해 수도원 담장을 혼자 넘어나가는 벙어리 신이 떠올랐다

  황무지 눈밭을 발자국 없이 뛰놀고 있었다

  봄잠 든 침묵의 콧등을 밟고 골짜기 숲으로 산책 나선 천진한 밝은 얼굴의 노수도사들도 있었다

 

  소리, 소리들을 보았다

  수도원 뒤쪽 산맥 넘어 흰눈이 걸어 내려오는 소리

  마당을 지나는 바람의 나무구두 소리

  저녁 종을 당겨 새의 길을 봉쇄하는 소리

  한 자루 촛불로 천년의 침묵과 어둠을 봉쇄하는…… 그런 소리들을

 

*영화 <위대한 침묵>의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웹진 『시인광장』 2010년 7월호 발표

 

 


 

류인서 시인

2001년 계간 《시와 시학》에 〈꽃 진 자리〉 등  여섯 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에는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창작과비평, 2005)와 『여우』(문학동네, 2009), 『신호대기』(문학과지성사, 2013)가 있음. 2009년 제6회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2010년 제11회 청마문학상 신인상, 2013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