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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지우 시인 / 산경(山經)을 덮으면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9.

황지우 시인 / 산경(山經)을 덮으면서

 

 

1

 

적설 20cm가 덮은 운주사(雲舟寺),

뱃머리 하늘로 돌려 놓고 얼어붙은 목선(木船) 한 척

내, 오늘 너를 깨부수러

오 해머 쇠뭉치 들고 왔다

해제, 해제다

이제 그만 약속을 풀자

내, 정(情)이 많아 세상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세상이 이 지경이니

봄이 이 썩은 배

하늘로 다시 예인해 가기 전

내가 지은, 그렇지만 작용하는 허구를

작파하여야것다

 

2

가슴을 치면

하늘의 운판(雲板)이 박자를 맞추는

그대 슬픔이 그리 큰가

적설 20cm,

얼음 이불 되어

와불 부부의 더 추운 동침을 덮어 놓았네

쇼크로 까무라친 듯

15도 경사로 누워 있는 부처님들

석면(石眼)에 괸, 한 됫박 녹은 눈물을

사람 손으로 쓸어 내었네

 

3

 

운주사 다녀 오는 저녁

사람 발자국이 녹여 놓은, 질척거리는

대인동 사창가로 간다

흔적을 지우려는 발이

더 큰 흔적을 남겨 놓을지라도

오늘밤 진흙 이불을 덮고

진흙덩이와 자고 싶다

넌 어디서 왔냐?

 

都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1

 

 


 

 

황지우 시인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영화(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자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1983

 

 


 

 

황지우(黃芝雨, 1952 ~ ) 시인

본명은 황재우. 1972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 1973년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강제입영 당하였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1985년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91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