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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 / 그날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 연기가 깔린 저녁길에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문과 창이 없는 거리 바람은 나뭇잎을 날리고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 아무도 죽은 이의 이름을 모른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그날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그림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배낭을 멘 채 시적시적 걸어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주막집도 들어가보고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대장간에서 풀무질도 해보고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옛사람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면 어떨까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지구 밖으로 훌쩍 떨어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길, 창작과비평사, 1990
신경림 시인 / 길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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