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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마지막 편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9.

정호승 시인 / 마지막 편지

 

 

순아 오늘도 에미는 네가 보고 싶어

아픈 몸을 이끌고 역에 나갔다

와 닿는 열차의 어느 칸에서고 네가

금방이라도 웃으면서 내릴 것 같아

차마 발길을 못 돌리고 에미는 또 울었다

 

남들은 다들 배우러 간다는데

웬수놈의 돈을 벌어보겠다고

이른 새벽 종지불 밝혀서 쑥국밥을 먹고

네가 고향을 떠나던 날

웬놈의 진눈깨비는 그렇게 뿌렸는지

 

처음엔 어느 곳 시다로 있다더니

곧 미싱사 보조가 되어 월급도 올랐다고

좋아라고 보내오던 네 편지

봉투째 부쳐오던 네 월급

 

이번 구정엔 틀림없이 에미 보러 온다기에

에미는 동네마다 옷장사를 나갔는데

눈 오는 시장바닥을 떠돌면서 기다렸는데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네가 먼저 가다니

이 에미를 남겨두고 네가 먼저 가다니

 

썰렁한 네 자취방 윗목에는

아직도 빈 라면봉지가 나뒹구는데

순아 하늘에는 겨울에 무슨 꽃이 피더냐

이 겨울하늘에도 눈물꽃이 피더냐

 

서울의 예수, 민음사, 1982

 

 


 

 

정호승 시인 / 맹인 부부 가수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 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