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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 마지막 편지
순아 오늘도 에미는 네가 보고 싶어 아픈 몸을 이끌고 역에 나갔다 와 닿는 열차의 어느 칸에서고 네가 금방이라도 웃으면서 내릴 것 같아 차마 발길을 못 돌리고 에미는 또 울었다
남들은 다들 배우러 간다는데 웬수놈의 돈을 벌어보겠다고 이른 새벽 종지불 밝혀서 쑥국밥을 먹고 네가 고향을 떠나던 날 웬놈의 진눈깨비는 그렇게 뿌렸는지
처음엔 어느 곳 시다로 있다더니 곧 미싱사 보조가 되어 월급도 올랐다고 좋아라고 보내오던 네 편지 봉투째 부쳐오던 네 월급
이번 구정엔 틀림없이 에미 보러 온다기에 에미는 동네마다 옷장사를 나갔는데 눈 오는 시장바닥을 떠돌면서 기다렸는데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네가 먼저 가다니 이 에미를 남겨두고 네가 먼저 가다니
썰렁한 네 자취방 윗목에는 아직도 빈 라면봉지가 나뒹구는데 순아 하늘에는 겨울에 무슨 꽃이 피더냐 이 겨울하늘에도 눈물꽃이 피더냐
서울의 예수, 민음사, 1982
정호승 시인 / 맹인 부부 가수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 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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