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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추인 시인 / 봄을 기다리는 방백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9.

김추인 시인 / 봄을 기다리는 방백

 

 

  물조리게를 들고 있는 당신, 녜 물을 주세요 그녀가 기다리니까요

  주르륵 혹은 점.점.점............. 물조리게를 기울여서 똑똑 노크하세요

  그녀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꽃,

  일반 명사인 그녀를 위해서 채송화든 나팔꽃이든 작약이든 아아―

  말희든 초희든, 꼭 고유명사가 아니면 어때요

  만에 하나 사양할까봐서라고요

  오 천만에 '배 고프다' 뇌리로부터 전언이 올 때 밥 들여 보내도 좋으냐

  위나 장에게 물어본 적 있나요

  아니잖아요 몸이 기다리니까 몸이 원하니까

  꽃이란

  가장 꽃답기를 누군가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아주기를

  그리고 흠뻑 받아 젖기를 그리하여 물 방울방울 머금은 구름꽃,

  향기로운 꽃구름으로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죠

 

  사람 하는 짓거리가 다 구름일 뿐이지만

  사람이 생각하듯이

  생각한 만큼 주기를 받기를 나누기를 기대하듯이 말이죠

  그녀에게 샘물을 퍼 주어요

 

  꽃,

  한낱 글자에 왜 물을 주냐고요?

  당신은 너무 따져요

  논리만 있는 인간치고 하는 일이 없어요

  분별치 마세요 힘의 논리든 시장의 논리든 전쟁을 부를 뿐이죠

  전쟁의 역사를 만들어 온 것들

  과학? 과학자?

  착각하지 마세요 과학은 따지지 않아요

  거기 있는 것, 그것일 뿐

  있는 사실을 드러내고 알려줄 뿐

  눈먼 수다장이들과는 다르죠

 

  누구셨더라

  꽃이란 글자에 물을 흠뻑 주시던 이

 

*

 

  보세요 그냥 돌일 뿐인 별 하나에

  물 흠뻑 주시는 하느님

  봄이 오쟎아요 초록별이 눈부시잖아요

  하느님도 그렇게 생뚱맞으세요

 

  엉뚱한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세요

  세상이 재미있어져요 네모진 세상말고 삐뚤빼뚤 물렁물렁한 못난이 세상,

  잼 있는 세상 당신, 물을 주세요

  신 초록들이 터져 나올걸요

  눈물의 웃음의 기원의 사랑의 쓰거운 나의 너의 싱거운

  싱그런 말간 멀건 비린 물을. 대지는 모두를 안아요

 

  초 사흘

  그러니까 오늘이죠. 새벽 3시, 한참 단잠인 제게

  하느님께서 물을 추루룩 추루룩 퍼 부우셨는데요

  아차, 오늘이 원고 마감날였나 봐요

  딱딱한 제 머리통에서 자모음들이 자라 나오더니

  새나오더니 이렇게 지질맞은 방백 같은 긴 독백 같은 것들이

  끝간 데 없이 늘어 섰네요

  잠이 덜 깼거든요

  퇴고도 하시겠단 걸 말렸어요

 

웹진 『시인광장』 2010년 봄호 발표

 

 


 

김추인 시인

1947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출생.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86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온몸을 흔들어 넋을 깨우고』, 『나는 빨래예요』,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위보』, 『벽으로부터의 외출』,  『모든 하루는 낯설다』, 『전갈의 땅』 등이 있음. 2017년 제8회 질마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