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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 / 길음시장
여기는 서울이 아니다 팔도 각 고장에서 못 살고 쫓겨온 뜨내기들이 모여들어 좌판을 벌인 장거리 예삿날인데도 건어물전 앞에서는 한낮에 윷이냐 샅이냐 윷놀이판이 벌어지고 경로당 마당에서는 삼채굿가락의 좌도 농악이 흥을 돋군다 생선장수 아낙네들은 덩달아 두레삼도 삼고 늙은 씨름꾼은 꽃나부춤에 신명을 푸는데 텔레비전에서 연속극이라도 시작되면 일 나간 아낙들이 돌아올 시간이라면서 미지기로 놀던 상쇠도 중쇠도 빠지고 싸구려 소리가 높아지면서 길음시장은 비로소 서울이 된다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신경림 시인 / 꿈의 나라 코리아
때와 먼지에 절은 술상에는 신 김치와 두부 무침 목에 켜켜로 쌓인 탄가루를 씻어내려고 부지런히 소주 주발을 들어올리는 시커먼 손들 진폐증으로 입원한 아들을 보러 간 주모 대신 굴속 같은 술청을 드나들던 쥔사내가 광부들보다도 먼저 취했다 광산살이 서른 해에 얻은 것은 가난한 병뿐이라고 셈날 아직 멀어 하나둘 외상을 긋고 나가는 문밖에 내리는 비도 검고 꿈의 나라 코리아 꿈의 나라 코리아 텔레비전 속 여가수의 하얀 목소리가 대낮인데도 밤처럼 검은 집과 사람들을 놀려대고 있다
길, 창작과비평사, 1990
신경림 시인 / 끊어진 철길
끊어진 철길이 동네 앞을 지나고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민통선 안 양지리에 사는 농사꾼 이철웅씨는 틈틈이 남방한계선 근처까지 가서 나무에서 자연꿀 따는 것이 사는 재미다 사이다병이나 맥주병에 넣어두었다가 네댓 병 모이면 서울로 가지고 올라간다 그는 친지들에게 꿀을 나누어 주며 말한다 ?이게 남쪽벌 북쪽벌 함께 만든 꿀일세 벌한테서 배우세 벌한테서 본뜨세?
세밑 사흘 늦어 배달되는 신문을 보면서 농사꾼 이철웅씨는 남방한계선 근처 자연꿀따기는 올해부터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한다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인근 버렸던 땅값 오르리라며 자식들 신바람 났지만 통일도 돈 가지고 하는 놀음인 것이 그는 슬프다 그에게서는 금강산 가는 철길뿐 아니라 서울 가는 버스길도 이제 끊겼다
길, 창작과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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