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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 무악재
기다려라 간다 무악재를 넘는다 새벽 동냥을 떠나는 소년의 발자국 소리를 따라 너를 찾으러 겨울밤 언덕 밖에 쫓기어 서서 울고 있는 너를 찾으러
간다 무악재를 넘는다 나는 너를 저버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결코 그 누구도 저버릴 수 없으므로 분명히 너는 살아야 하고 나도 살아야 하므로 살아온 설움의 고요함을 깨뜨려야 하므로
기다려라 부디 기다림에 묻은 목마른 먼지를 털고 더 이상 우리들의 삶을 위하여 너는 이제 너 홀로 통곡하지 말아라 눈물은 기다림보다 멈출 수 없고 우리들은 눈물로 지탱할 수 없나니
기다려라 부디 흰 들녘 가지 끝에 눈송이로 휘날리는 너를 찾아서 간다 무악재를 넘는다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정호승 시인 / 백두산을 오르며
백두산에 도착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흰 자작나무 사이로 외롭게 걸려 있던 낮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잣까마귀들이 떼지어 날던 하늘 사이로 서서히 함박눈은 퍼붓기 시작했다 바람은 점점 어두워지고 멀리 백두폭포를 뒤로 하고 우리들은 말없이 천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눈 속에 핀 흰 두견화를 만날 때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우리들은 저마다 하나씩 백두산이 되어갔다 눈보라가 장백송 나뭇가지를 후려 꺾는 풍구(風口)에서 마침내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올라갈수록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내려갈수록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눈보라치는 백두산을 오르며 우리들은 다시 천지처럼 함께 살아가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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