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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호 시인 / 부패의 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2.

최승호 시인 / 부패의 힘

 

 

뚱뚱한 쥐가 더욱 뚱뚱해지고

뚱뚱한 쥐가 뚱뚱한 쥐새끼들에게

너희들도 뚱뚱해져야 한다고 자꾸 처먹인다

뚱뚱한 쥐 눈에는 뚱뚱한 쥐의 행복만 보이니까

싸워서라도 뚱뚱해져야 한다고 뚱뚱한 쥐들이

서로 잡아 먹으며 뚱뚱해지고 놀라웁게 뚱뚱해지고

이만하면 투실투실한 게 남 보기에도 뚱뚱한데

또 뚱뚱해져야겠다고 잡아 먹고 잡어 먹어서 얼씨구

이러다간 큰 쥐 한 마리 내지 뚱뚱한 쥐가족만 살아 남겠네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뿔 돋친 벽

 

 

죽음은 뿔과 같다, 딱딱한 것,

뾰족한 것, 노려보는 것, 속이 텅 빈 것.

느닷없이 죽음과 마주쳐

처음엔 얼마나 놀랐는지,

증기탕에서 털투성이 음부를 보고

울어 버린 소년의 공포 그것이었다.

죽음, 뿔 돋친 벽,

죽음을 벗어나는 일은

코뿔소가 제 코뿔 속으로 들어가려고

애써 먼 길을 뛰는 것과 같고

뿔 돋친 벽에 머리를 찧으며

피 흘리는 수고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제 머리를 끊어

구르는 두개골로 축구를 하며

`나는 이제 죽음에서 해방되었노라'고 외치면서

머리 없이 광장을 가로지르는

광인을 상상해 보셨는지?

죽음, 뿔 돋친 벽,

그 벽에 먼저 덤빌 필요가 없다.

언젠가는 그 벽이 달겨들어야 하겠지만

그때는 온몸에 뿔이 박힌 채

구멍투성이로 울부짖어야 하겠지만.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서울대학교와 同 대학원 졸업.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과 산문집으로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과 그림책으로 『누가 웃었니?』, 『이상한 집』이 있음.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