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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다시 남한강(南漢江) 상류에 와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2.

신경림 시인 / 다시 남한강(南漢江) 상류에 와서

 

 

헐벗은 가로수에 옹기전에 전봇줄에

잔비가 뿌리고 바람이 매달려 울고

나는 진종일 여관집 툇마루에 나와

잿빛으로 바랜 먼 산을 보고 섰다

배론땅은 여기서도 삼십 리라 한다

궂은 날 여울목에서 여자 울음 들리는

강 따라 후미진 바윗길을 돌라 한다

목 잘린 교우들의 이름 들을 적마다

사기가마 굳은 벽에 머리 박고 울었을

황사영을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친구들의 목숨 무엇보다 값진 것

질척이는 장바닥에 탱자나무 울타리에

누룩재비 참새떼 몰려 웃고 까불어도

불과 칼로 친구들 구하려다

몸 토막토막 찢기고 잘리고 씹힌

그 사람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번개가 아우성치고 천둥이 울부짖을 때

추자도 제주도 백령도로 쫓기며

그 아내 원통해 차마 혀 못 깨물 때

누가 그더러 반역자라 하는가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헐벗은 가로수에 옹기전에 전봇줄에

잔비가 뿌리고 바람이 매달려 우는

다시 남한강 상류 궁벽진 강촌에 와서

그 아내를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내 친구를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 달, 달

 

 

마당에 자욱한 솔잎 내음

가마솥에 송편을 세 번 쪄내도록

객지 나간 딸들 왜 기별 없을까

늙은 양주 민화투도 시들어질 쯤엔

노란 국화꽃 감으며 드는

어스름 땅거미도 서럽고

 

문득 문밖에 인기척 있어

반색하고 문 열어 내다보니

달이 눈부시게 차려 입고

대문을 밀고 들어서고 있다

그 뒤로 또하나 달이

눈물과 한숨으로 나무에 걸린 어스름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신경림 시인 / 달 넘세*

 

 

넘어가세 넘어가세

논둑밭둑 넘어가세

드난살이 모진 설움

조롱박에 주워담고

아픔 깊어지거들랑

어깨춤 더 흥겹게

넘어가세 넘어가세

고개 하나 넘어가세

얽히고 설킨 인연

명주 끊듯 끊어내고

새 세월 새 세상엔

새 인연이 있으리니

넘어가세 넘어가세

언덕 다시 넘어가세

어르고 으르는 말

귓전으로 넘겨치고

으깨지고 깨어진 손

서로 끌고 잡고 가세

넘어가세 넘어가세

크고 큰 산 넘어가세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기고

디딜 것은 디디고

밟을 것은 밟으면서

넘어가세 넘어가세

세상 끝까지 넘어가세

 

넘세'는 어* 달 넘세: 흔히 `달람새'라고도 하는데 경북 영덕 지방에서 하는 여인네들의 놀이 `월워리 청청'의 한 대목으로, 손을 잡고 빙 둘러앉아 하나씩 넘어가면서 `달 넘세' 노래를 부름. `달을 넘어가자'는 뜻의 `달려움을 극복해가는 일을 상징한다고 함.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