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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하림 시인 / 마음의 그림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3.

최하림 시인 / 마음의 그림자

 

 

하염없이 먼 길을 걸어왔다 드문드문

나무들이 서 있었고 여린 가지들이

부러질 듯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언덕배기도 있었다.

콧수염을 기르기 전의 원갑희(元甲喜)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고 있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섭섭치 않았다

옛날의 눈물이 무지개로 기일게 서산(西山)에 떠올랐다

시(詩) 라고들 그랬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최하림 시인 / 말하기 전에, 나는

 

 

여느 때와 다르게

공기가 부풀어 오르고

담장이 유리빛으로 빛나고

들녘의 잡초들이 바람에 날렸다

어떤 관목숲으로도 서 있지 못하는

새들이 하늘과 물 속으로 갈앉았다

지상엔 지나간 시간의 상처뿐

십일월의 그림자들이 다도해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나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잎 푸른 가지 속으로 들어가

내가 시름을 나눌 수 있는 의자와 책들 사물들

아직도 불켜 있는 스탠드와 불안하기는 하지만

서쪽으로 열려진 창문들

  바람은 언제나 나직이 흘러갔지

  풀숲들이 나직이 속삭였지

  나는 네 속으로 들어가

  네 속에서 편안히 잠을

그러나 잠은 꿈일 뿐 나는 잠들 수 없었다

멀리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나무와 돌 사이

언덕과 구렁 사이 죄와 벌이 서성거리고

나는 잘려진 도마뱀처럼, 시간들을 진행형으로

떠올리지 못하고 토막토막, 나누어 이해했다

엉클어진 기억들이, 어둠 속에서 악마구리같이 아우성치며,

유리창을 깨트리고, 오오, 말하기 전에, 나는,

이대토록 상처투성인지 몰랐다

나는 말에게 버림받았다

버림받은 말 속으로 한 줄기 빛이

나무들을 비추고 이파리들을 비추었다

어떤 확신의 말도 나는 할 수 없다

파충류가 얼굴에 달라붙는다

절망의 부레 찢어지는 소리 들린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崔夏林,1939.3.7 ~ 2010,4.22]  시인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침묵의 빛』 그리고 시전집 『최하림 시 전집』 등이 있음 그 밖에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자유인의 초상』과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냄.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