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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지우 시인 / 아내의 편지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4.

황지우 시인 / 아내의 편지

 

 

미숙아

 

잘 지냈니? 너의 출산 속식을 기다렸지만 편지 길도 끊겨 몹시 궁금했다. 거의 두 달이 다되어가는데 아이는 잘 크는지?

 

그리고 광주엔 너무나 아픈 일들이 있어 혹시 동생 승철이라도 다치지 않았는지 빠른 생각이 미치는구나. 5월과  6월이 한 장에 담긴 달력에  이제 모든 괴로움의 순간들이 모질게  조금씩정리되어간다. 5월의 그날들, 화염  속의 내 고향 광주. 비 내리는 뜰에 붉게 피어 있는 장미꽃이저주스럽고, 기독교 방송은 종일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려주었다.

 

휴교기간중에 애 키우기에는 오히려 다행스럽기도 했겠구나. 네 집주소를 잃어버려 이렇게학교로 띄운다만, 미덥지 않아서 말이 자꾸 끊어진다. 이해해라.

 

애 아빠는 들어가 있다. 오늘이 한 달째다. 성북(成北)을 다녀오면서 버스 속에서 조용필의 `창 밖의 여자'를 듣는다. 차창 밖으로는 또 비가 내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저 거리가, 이 세상이, 내가, 모두 물에 잠겨버렸으면! 내 마음이 사나워진다.

 

그이는 며칠 후면 다른 곳으로 이송될 모양이다.

 

우리 아이들은 잘 큰다. 다섯 살 짜리 큰애는 개구장이다. 엄마를 때리고 엄마가 슬퍼서 울면 엄마 눈 아파? 하고 내 얼굴 전체에 다가온다. 여동생 우유를 빼앗아 먹고 그 대신 끔찍히도제 동생을 귀여워한다. 제 아빠를 만나고 온 후로는 내 앞에서 일체 아빠를 찾지 않는다. 아이들이 먼저 비극을 알아버린 것 같아서 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그렇지만, 73년 가을 그가 동대문에서서대문으로 갈 때 그때보다 더 내가 침착할 수 있는 게 이 두 아이들 때문인 것 같다.

 

내 나이 스물에서 스물아홉에 이르는 시간 전부가 그에게 속해버린 지금. 혁대를 풀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심한 상처를  입은 듯 다리를 절고 있는 그이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이 콱 막혔다. 내 살이 그이의 살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나는, 단속반에 쫓겨 리어카를 끌고 달리는 노점상들의 얼굴과만났다. 저분들은, 그렇다, 지금 나보다 더 위급하다. 몇 포기의 상추를 따와 길모퉁이에 자리잡은 할머니는 급히 도망가는 리어카에 치여 발목을 다친다. 그렇다, 나는 그분들께 미안하다. 지금 내가 아픈 것은 나 혼자만의 상처가 아니다. 다친 할머니의 발목으로 집까지 걸어오는 사이, 이제 한 사람이 아프면 모두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보이지 않는 데서도 아이들 우는 소리를 들을 수있게 되었다. 어서 가자, 주둥이 벌리고 있는 나의 제비새끼들에게. 주인 없는 집에서 오늘 저녁에는 아이들에게 상추쌈을 해 주었다.

 

오늘은 너무 내 이야기만 했구나. 미안하다. 부엌에 가서 연탄 갈고, 또 혼자 울고, 그래서몇 번씩 끊긴 글이다. 그러나 너한테 이렇게 씀으로 해서 나는 이미 다 위로받은 것 같다.

 

5월에 태어난 너의 아가에게, 의(義)에 굶주린 우리나라 모든 사람의 축복을 전하고 싶다. 생각나니? 우리가 하얀 하복을 입고 지산동(芝山洞) 아카시아 숲길을 걷던 때. 넌 유난히 잘 웃고, 웃으면 염소처럼 빨간 잇몸이 다 드러났었지. 늦게 간 시집이니까 남편 사랑 많이 받겠구나.

 

여느 때 같으면 술꾼들의 싸움 소리가 요란할 텐데 오늘밤은 이 신림이 고요하기만 하다. 언제 우리 만나 서로 부둥켜안고 실컷 울어버리자.

 

                                                                               6월 28일

                                                                        너의 숙희로부터

 

餠煎こすシ觀壙  봄―나무에로, 민음사, 1985

 

 


 

 

황지우(黃芝雨, 1952 ~ ) 시인

본명은 황재우. 1972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 1973년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강제입영 당하였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1985년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91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