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강은교 시인 / 운조의 골목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8.

강은교 시인 / 운조의 골목

 

 

                    운조가 걸어간다 / 운조가 걸어간다 / 푸른 지평선

                    황토치마 벌리고 / 한 모랭이 지나 은빛 냄비 사이로 /

                    두 모랭이 지나 은빛 국자 사이로 / 운조가 걸어간다 /

                    마음떨며 운조가 걸어간다.

 

  이제 그가 올시각

  비애로 불룩한 여행가방 끌고 그가 올 시각

  좁고 좁은 골목길

  낱낱이 외로운 발소리처럼

  발소리의 주름처럼

  이제 그가 올 시각

  오래된 천정 밑 깊고 깊은 지하방

  흘깃흘깃 떨고있는 창틀들 아래로

 

  너는 기억

  너의 피부는 상실의 촉각  

  잊지마,

  창틀을 먼지는 사랑했음을

  별들이 오면 여윈 창살들 화알짝 어깨를 열곤 했음을

 

  그렇게 말렸음에도 비름은 끓는 물을 향해 뛰어들었다

  거기서 몸을 조금 푼 다음

  슬쩍 데쳐질 것이다.

 

                       운조가 걸어간다 / 운조가 걸어간다 / 푸른 지평선

                       황토치마 벌리고 / 한 모랭이 지나 은빛 냄비 사이로 /

                       두 모랭이 지나 은빛 국자 사이로

 

  이제 그가 올 시각

  비애들의 여행가방 끌고 그가 올 시각

  졸고 있는 오후의 선반처럼

  먼지 깊은 지하골방, 그가 올 시각

 

  일몰의 캡 흔들며

  그가 올 시각

 

                        운조가 걸어간다 / 운조가 걸어간다 / 푸른 지평선

                        황토치마 벌리고 / 한 모랭이 지나 은빛 냄비 사이로 /

                        두 모랭이 지나 은빛 국자 사이로 / 운조가 걸어간다 /

                        마음떨며 운조가 걸어간다

 

웹진 『시인광장』 2012년 11월호 발표

 

 


 

강은교 시인

1945년 함남 홍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등 다수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과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음.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과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