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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수권 시인 / 아도(啞陶)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8.

송수권 시인 / 아도(啞陶)

 

 

아도*란 무엇이냐

질그릇이다.

인사동 골짜기의 고물상 같은 데 가서 만나보면

입은 기다랗게 찢겨져 있고 두 귀는 둥글게

구멍이 패어 있는

입이 있어도 벙어리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못생긴 우리네의 질그릇이다.

유언비어를 날조하거나

겁쟁이 지식인들의 입을 누르는

그것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은밀히 건네는

유가풍의 금서(禁書)와 같은

질그릇이다.

 

사화가 극심했던 시절엔 서울의 아도상(商)은

짭짤한 재미를 보았고

외세가 판을 치던 시대엔

주먹만한 아도를 사들고 관직에서 떨려난 선비들은

줄을 이어 낙향했다.

우리들의 입에 재갈 물리고 귀에 자물쇠 채우는

이 희한한 물건은

이태조가 서울의 땅 기운을 끄기 위해

간신배 정도전을 시켜 고안해 낸 물건이었다.

또한 수상기가 오른 입의 뻗세디 뻗센 집 문간엔

아도 일백 개를 사서 쌓아 두기도 했다.

 

신라 때 복두장이는

하루 아침 임금의 귀가 당나귀 귀로 변해 버린 것을 보고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

도림사 대숲가에 가서 외치다

아무도 듣는 이 없어 복장이 터져 죽었다지만

 

나는 오늘 이 도시의 어디선가

목을 조르며 도둑고양이처럼 오는 최루탄 가스에

재채기 콧물 눈물 범벅이 되면서

잎 핀 오월의 가로수 밑에 비틀거리면서 비틀거리면서

그 시대에서 한 발짝도 더 깨어나지 못한

또 하나의 아도가 되어가는 내 모습을 본다.

아도 아도 아도 아도 아아아아 아도

이 땅의 시인이여 만세.

 

* 아도(啞陶): 조선 건국시 이태조가 정도전을 시켜 만든 주먹만한 질그릇. 입은 찢어져 있고 눈이 감겨 있는 얼굴 모양이었는데, 이 질그릇을 지식인의 대문간에 하룻밤새 100개씩 쌓아 놓으면 `말조심'하라는 요시찰 인물임을 표시했고 그래도 입이 빳빳하면 끌어다 고문을 가했다고 함.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 시인 / 여승(女僧)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뒤돌아 뛰어 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 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 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宋秀權, 1940.3.15 ~ 2016.4.4]시인

1940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호는 평전(平田).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제1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1980. 문학사상), 제2시집 『꿈꾸는 섬』(1982. 문학과지성사), 제3시집 『아도(亞陶)』(1985. 창작과비평사), 제4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동학서사집)』(1986. 나남), 제5시집 『우리들의 땅』(1988. 문학사상), 제6시집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1991. 전원), 제7시집 『별밤지기』(1992. 시와시학사), 제8시집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 (1994. 문학사상), 제9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노을』 (1998. 시와시학사), 제10

시집 『파천무』(2001. 문학과경계사), 제11시집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2005. 시학사), 제12시집 장편서사시 『달궁 아리랑』(2010. 종려나무), 제13시집 『하늘을 나는 자전거』, 제14집 『빨치산』 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제1회 영랑시문학상(2003), 김달진 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