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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기원 시인 / 플루토이드(plutoed)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8.

강기원 시인 / 플루토이드(plutoed)

 

 

  심야의 엘리베이터

  CCTV

  한 소녀를 찍고 있다

  무거운 가방을 멘 채

  습관처럼 누르는

  4층

  잠시 망설이다

  오래 망설이다

  24층

  거울을 바라본다

  핏기 없는 얼굴

  머리를 감싸고

  쭈그려 앉아

  운다

  직립의 움직이는 관

  문이 열리고

  천천히 일어나

  관 뚜껑 밖으로

  발을 내딛는다

  대도시

  블랙홀의 어둠 속으로

 

  1385일의 궤도를 벗어난

  소녀 행성

  가장 멀리 있는, 둥글지 않은, 질량이 너무 작은, 불안정한

  태양의 끝

  작은 심장으로 날아가

  플루토이드

  적갈색 왜행성이 된다

  이름을 빼앗긴

  소행성 134340

 

웹진 『시인광장』 2017년 1월호 발표

 

 


 

 

강기원 시인 / 로브그리예를 읽는 밤

 

 

  로브그리예는 이리도 친절하고 그리도 불친절해. 그의 섬세함과 무심함, 빙정 같은 투명과 굴헝 같은 두터움, 전위적인 누보와 고전적인 턱수염을 난 사랑해. 널 사랑하듯이. 협주곡은 2악장만 듣고 추리소설은 절대 읽지 않는 내게 그는 얼마나 아늑하고 섬뜩한지.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사라지는 족속들. 가령, 구름이나 오로라 챠크라 달무리 해무리 금빛먼지……따위. 너의 희미함에 대해, 늘 모퉁이를 돌아서는 너의 뒷등에 대해. 그러나 로브그리예처럼 현재 시제로만 말할 수는 없어. 너와 나의 시제는 중음(中陰)의 시제. 냉정한 그의 소설을 읽으며 뜨거웠던 나의 피를 생각해. 혼자서 펄펄 끓던 그 막무가내를. 그런 나를 그저 무연히 바라만보던 널 얘기하려니 늙은이처럼 자꾸 중얼거리게 되는군. 지루한 화법. 사실 사막의 회전초처럼 끝도 없이 굴러가는 이 얘기 계속할 생각은 없어. 그나저나 너, 아직 항온동물이지? 난 다행인지 불행인지 변온동물로 퇴화 중이야. 진화인가? 언젠가 버겁던 피가 차디 차게 식어 소름이 비늘로 바뀌고 자꾸 잘리는 꼬리가 생기고 급기야는 사지가 사라져 죽음 같은 겨울잠에 빠져들지도 모르지. 그러기 전에, 이 밤이 또 벌레먹은 밤처럼 가버리기 전에 너와 나의 연대기처럼 줄거리도 없는 로브그리예를 다시 펼쳐드는 거야. 그런데 대체 어디까지 읽었더라?

 

시집『지중해의 피』(민음사, 2015) 중에서

 

 


 

강기원 시인

1958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요셉 보이스의 모자〉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세계사, 2005)와 『바다로 가득 찬 책』(민음사, 2006),『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민음사, 2010)이 있음. 2006년  제25회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