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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원 시인 / 플루토이드(plutoed)
심야의 엘리베이터 CCTV 한 소녀를 찍고 있다 무거운 가방을 멘 채 습관처럼 누르는 4층 잠시 망설이다 오래 망설이다 24층 거울을 바라본다 핏기 없는 얼굴 머리를 감싸고 쭈그려 앉아 운다 직립의 움직이는 관 문이 열리고 천천히 일어나 관 뚜껑 밖으로 발을 내딛는다 대도시 블랙홀의 어둠 속으로
1385일의 궤도를 벗어난 소녀 행성 가장 멀리 있는, 둥글지 않은, 질량이 너무 작은, 불안정한 태양의 끝 작은 심장으로 날아가 플루토이드 적갈색 왜행성이 된다 이름을 빼앗긴 소행성 134340
웹진 『시인광장』 2017년 1월호 발표
강기원 시인 / 로브그리예를 읽는 밤
로브그리예는 이리도 친절하고 그리도 불친절해. 그의 섬세함과 무심함, 빙정 같은 투명과 굴헝 같은 두터움, 전위적인 누보와 고전적인 턱수염을 난 사랑해. 널 사랑하듯이. 협주곡은 2악장만 듣고 추리소설은 절대 읽지 않는 내게 그는 얼마나 아늑하고 섬뜩한지.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사라지는 족속들. 가령, 구름이나 오로라 챠크라 달무리 해무리 금빛먼지……따위. 너의 희미함에 대해, 늘 모퉁이를 돌아서는 너의 뒷등에 대해. 그러나 로브그리예처럼 현재 시제로만 말할 수는 없어. 너와 나의 시제는 중음(中陰)의 시제. 냉정한 그의 소설을 읽으며 뜨거웠던 나의 피를 생각해. 혼자서 펄펄 끓던 그 막무가내를. 그런 나를 그저 무연히 바라만보던 널 얘기하려니 늙은이처럼 자꾸 중얼거리게 되는군. 지루한 화법. 사실 사막의 회전초처럼 끝도 없이 굴러가는 이 얘기 계속할 생각은 없어. 그나저나 너, 아직 항온동물이지? 난 다행인지 불행인지 변온동물로 퇴화 중이야. 진화인가? 언젠가 버겁던 피가 차디 차게 식어 소름이 비늘로 바뀌고 자꾸 잘리는 꼬리가 생기고 급기야는 사지가 사라져 죽음 같은 겨울잠에 빠져들지도 모르지. 그러기 전에, 이 밤이 또 벌레먹은 밤처럼 가버리기 전에 너와 나의 연대기처럼 줄거리도 없는 로브그리예를 다시 펼쳐드는 거야. 그런데 대체 어디까지 읽었더라?
시집『지중해의 피』(민음사, 201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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