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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 / 산읍기행(山邑紀行)
장날인데도 무싯날보다 한산하다. 가뭄으로 논에서는 더운 먼지가 일고 지붕도 돌담도 농사꾼들처럼 지쳤다.
아내의 무덤이 멀리 보이는 구판장 앞에서 버스는 섰다. 나는 아들놈과 노점 포장 아래서 외국 자본이 만든 미지근한 음료수를 마셨다.
오랜만에 보는 시골 친구들의 눈은 왜 이렇게 충혈돼 있을까. 말이 없다. 그저 손을 잡고 흔들기만 한다. 그 거짓된 웃음.
돌과 몽둥이와 곡괭이로 어지럽던 좁은 닭전 골목. 농사꾼들과 광부들의 싸움질로 시끄럽던 이발소 앞. 의용소방대원들이 달음질치던 싸전 길.
장날인데도 어디고 무싯날보다 쓸쓸하다. 아내의 무덤을 다녀 가는 내 손을 뻣뻣한 손들이 잡고 놓지를 않는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산읍일지(山邑日誌)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눈 오는 밤에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박군은 감방에서 송형은 병상에서 나는 팔을 벤 여윈 아내의 곁에서 우리는 서로 이렇게 헤어져 지붕 위에 서걱이는 눈소리만 들을 것인가 납북된 동향의 시인을 생각한다 그의 개가한 아내를 생각한다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이 산읍에서 아이들의 코묻은 돈을 빼앗아 연탄을 사고 술을 마시고 숙직실에 모여 섰다를 하고 불운했던 그 시인을 생각한다 다리를 저는 그의 딸을 생각한다 먼 마을의 개 짖는 소리만 들을 것인가 눈 오는 밤에 가난한 우리의 친구들이 미치고 다시 미쳐서 죽을 때 철로 위를 굴러 가는 기찻소리만 들을 것인가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이 산읍에서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새벽
보이나, 저 사람들이 보이나. 화해의 시대라고 야단들을 치는군. 배에 기름 끼면 간사한 꾀만 늘지. 죽도록 고생한 자들까지 왜 덩달아 맞북 치지. 늙고 지쳤으니까. 암, 늙고 지쳤으니까. 우리도 이렇게 함께 앉았으니 이것이 화해인가. 서로 쏘고 찌른 상처 매만지며 함께 앉았으니까. 아닐세, 우린 서로 미워한 일이 없지. 아닐세, 우린 옛날로 돌아가면 되지. 자 떠나세, 동이 트네. 저, 떠나세, 날선 낫 하나씩 들고. 자, 떠나세, 원수를 찾아서.
―이른 새벽 휴전선 부근, 경지정리로 파헤쳐진 무덤 속에서 두개골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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