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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지우 시인 / 전령의 외로운 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9.

황지우 시인 / 전령의 외로운 길

 

 

꼭 10년 만에 옛날 근무하던 임진강(臨津江)을 가 보았다. 연대 앞 위병소에서 내려 버스가 남긴 황토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10년 간의 외출을 마치고 막 귀대한 육군 병장 황병장이었다. 10년, 10년 간의 외출, 애인을 만나고 그 애인과 한 10년 늘어지게 살다가, 어유지리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  포플라나무, 감리교 웨슬레이씨가 들어와서 지은 돌벽 교회, 산드기씀밧골로 가는 작전도로, 나는 문서 수발을 끝내고 돌아가는 그 전령의 외로운 길을 걸어갔다.능선에 옥수수밭이 쓰러지도록 무성하고, 강 건너 너도밤나무 숲이 있는민통선(民統線)까지. 불귀(不歸), 불귀(不歸)의 강, 임진강.

 

나는 너다, 문학과지성사, 1987

 

 


 

 

황지우 시인 / 제1한강교에 날아든 갈매기

 

 

이름도 알 수 없는 간밤의 수많은 간이역들을 깨우고 달려온 목포발 보통열차가 막 철교를통과하여 용산역으로 들어가던 오늘 아침,

 

그보다 빠른 속도로 그 옆을 먼저 비켜 달려간 성북행 전철이 러시아워대의 지하 서울로기어 들어가던 오늘 아침,

 

그리고 신경질나게 느린 속도로 사육신 묘지 앞을 지나 밀리고 밀린 제1한강교로 들어서는오늘 아침,

 

나는 보았다 출근길 시내버스 속에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얼굴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둔부와 치골이, 치골과 둔부가,  둔부와 둔부가, 치골과 치골이 서로 곤두서게, 빽빽하게 맞닿은 사이에서

 

나는 보았다

 

제1한강교 철제 아치 사이로 날아든 갈매기 한 마리를 나는 보았다 보았는데

 

서울역, 갈월동, 남영동, 미8군 본부 앞에서부터 노량진까지 차량이 밀려 있는

 

인내와 순종과 관용과 무관심과 체념과 적응력의 이 긴 대열 속에서

 

이 연체의 시간 속에서

 

일천구백오십년 북으로부터 남하하기 시작한 피난민들과

 

일천구백육십일년 남으로부터 북상했던 해병 제공공 사단 병력들이

 

내려오고 올라갔던 제1한강교, 철제 아치 위를 유유히 지나 동부이촌동과 반포 아파트 쪽으로 가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를

 

보았는데, 나는 그것이

 

꼭 그의 죽음의 자기 예고의 풍향과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저도 먹고 살려고 바둥대다보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라고만 생각했지만

 

그는 잘못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잘못 날아 왔었다

 

그는 잘못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잘못 날아 왔었다

 

아, 이렇게 정지된 순간에, 제1한강교에서 반포 아파트 쪽으로 바라본 한강은

 

얼핏 보면 바다 같고

 

자세히 보면 사이비 바다다

 

장산곶, 백령도, 용기포, 대청도, 장자도, 소연평도, 주문도, 교동도……

 

혹은 어청도, 궁시도, 흑도, 가덕도, 백아도, 선미도, 소야도, 장봉도……

 

혜화동 영세 출판사 사무실에 붙은 백만분지일 우리 나라 지도에서 나는 그의 해도(海圖)를찾는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1983

 

 


 

 

황지우(黃芝雨, 1952 ~ ) 시인

본명은 황재우. 1972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 1973년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강제입영 당하였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1985년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91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