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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아버지의 눈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9.

정호승 시인 / 아버지의 눈물

 

 

끼니마다 감자꽃 메밀꽃만 따먹다가

고구마밭 고구마만 몰래 캐어먹다가

싸전 앞 가마더미 쌀알로 뒹굴다가

머슴들 찍어먹던 청소금이 되었다가

오징어배 떠나간 벼랑 끝에 남아 있는

흰 고무신 한 켤레 찾아 신고 걷다가

첫날밤 피 흘리던 보름달 빠져 죽은

우물 속에 무덤 속에 소나기로 퍼붓다가

숫돌 위에 내려앉아 푸른 낫을 갈다가

밤비 따라 한밤 내내 한강물에 빠지고

새벽 공동수돗가 빈 물통 속 담겼다가

사글셋집 양철지붕 우박으로 때리다가

지게꾼이 주워 피운 꽁초 위에 젖어 울며

한국은행 분수보다 먼저 솟아오르는

아들놈 총 들고 떠나간 바다.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정호승 시인 / 어머니

 

 

호롱불 켜놓고 밤새워

콩나물 다듬으시던 어머니

날 새기가 무섭게 콩나물다라이 이고 나가

온양시장 모퉁이에서 밤이 늦도록

콩나물 파시다가 할머니 된 어머니

그 어머니 관도 없이 흙속에 묻히셨다

콩나물처럼 쓰러져 세상을 버리셨다

손끝마다 눈을 떠서 아프던 까치눈도

고요히 눈을 감고 잠이 드셨다

일평생 밭 한 뙈기 논 한 마지기 없이

남의 집 배추밭도 잘도 잘 매시더니

배추 가시에 손 찔리며 뜨거운 뙤약볕에

포기마다 짚으로 잘도 싸매시더니

그 배추밭 너머 마을산 공동묘지

눈물도 없이 어머니 산 속에 묻히셨다

콩나물처럼 누워서 흙속에 묻히셨다

막걸리에 취한 아버지와 산을 내려와

앞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니 말씀

얘야, 돌과 쥐똥 아니면

곡식이라면 뭐든지 버리지 말아라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