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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인 / 서 있는 사람
모든 구름이 달리고 달려서 가로수 이파리를 떨어뜨리고 오늘밤에는 어디로인지 난리처럼 가는데 아직도 너는 붉은 등 아래 서 있구나 통금이 다가온 거리 빈 거리 어둠이 자라 꽃이 되고 더러운 잠자리로 사내들이 들어가고 계집들이 천한 꿈에 시달리는데 아아 깊은 바다의 등불 아래 시름을 두고 아직도 너는 하늘을 우러르나 어느 한자락 구름이 네 맘을 담지 못하누나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최하림 시인 / 설야(雪夜)
하늬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밤 그이는 하마 취비강을 건너갔을까 보내는 이들이 밤을 설치며 그리는 그 얼굴 그 눈동자가 가슴에 불붙어 타오르는데 그이는 수많은 노두를 건너서 바람과 눈보라를 헤치고 무사히 자유에 발 디뎠을까 슬퍼라 어둔 지방의 인내를 버리고 사나이들은 사랑을 찾아 고단한 육신으로 산과 내를 건너가는데 밤 물길을 끌고 지친 화적패처럼 건너가는데 음산한 지방을 새하얗게 물들이면서 때묻은 말을 버리고 내리는 눈 눈 눈 눈이여 오만 가지 죄의 모습과 인욕을 씻고 가는 이의 사랑을 따라나서는 길을 마련하라 구석구석이 허사로 가득한 밤 우리들은 허사에서 배어나오는 암흑을 보며 암흑 속에서 승냥이처럼 울부짖는다. 울부짖음이 암흑 속으로 사라져 암흑이 되어 돌아온다 암흑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눈보라 속으로 몰아 넣는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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