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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호 시인 / 주전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30.

최승호 시인 / 주전자

 

 

진눈깨비가 내린다

누비옷으로 몸을 감싼 여인들이

누비옷 속에 아기를 업고 창 밖을 지나간다

증기를 뿜는 주전자

아가리를 뚜껑으로 덮으니

답답해

콧구멍이 뚫렸어도 답답해

증기를 뿜는 주전자가 뚜껑을 들먹거린다

형이상학의 뚜껑 밑에

댓진 냄새 풍기는 파이프

연기를 코로 내뿜는 형이상학자들

그리고 물 위로 콧구멍만 내놓는 소심한 해마(海馬)들이여

콧구멍만 뚫렸으면 뭘 해

이렇게 무식하고

이렇게 숨이 차고

이렇게 대머리가 점점 벗겨지는 생(生)

때때로 고뿔까지 앓으면서 훌쩍이고

이렇게 죽어가는 죽어가는 생(生)

주전자의 코는 코뿔소의 코뿔처럼 낯설고

살가죽도 낯설고 이제는 내 턱뼈조차 낯설다

콧구멍만 뚫렸으면 뭘 해

묵묵히 콧김이나 뿜으면서

이렇게 해마(海馬)의 주름살이 잡혀가는 생(生)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죽은 해마(海馬)

 

 

밥을 먹다가 보았다

새우젖 사발에 꼬부라져 누워 있는 해마(海馬)

해마(海馬) 새끼를

꼿꼿이 서서 헤엄쳐다녀야 할 해마(海馬)가

최초로 이렇게

절여진 슬픈 꼴로 눈앞에 나타나다니

허지만

해마(海馬)는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자기를 시집(詩集)에 넣어 달라고

나는 기꺼이 시집(詩集)에 넣겠다

죽은 해마(海馬)를 위해

다음과 같이

 

사발에 누워 있다가 보았다

밥을 먹고 있는 남자

밥맛이 없어 보이는 남자를

하필이면 저런 꾀죄죄한 인간이

저승의 옥졸(獄卒)마냥

나를 방망이로 뒤적이고 있나니

허지만

그는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해마(海馬)라는 한 편의 시(詩)를

나는 기꺼이 시(詩)가 되어 주겠다

아직 살아 있는 남자를 위해

다음과 같이

 

생전(生前)에 나는 해마(海馬)였다 아버지의 배주머니 속에서 아버지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이제 나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고래의 너털웃음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멍게의 울음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온갖 해마적(海馬的)인 감정이 증발하였다 내가 살던 해마(海馬)의 마을에 평화가 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물의 그물코가 넓어야 걔네들이 해마(海馬)답게 살텐데…새우 그물은 얼마나 촘촘하고 튼튼했는지 새우들의 이마뿔이 부러지고 왕새우의 왕초도 구멍 하나 뚫지 못했다 정작 구멍이 뚫린 것은 내 살이다 요즘 나는 계속 해체되는 중이다 하기야 내 살은 바다가 잠시 빌려 줬던 것이니까 해체되면서 성하(聖河)의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다 자 그럼 절여진 해마(海馬)는 이만 안녕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서울대학교와 同 대학원 졸업.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과 산문집으로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과 그림책으로 『누가 웃었니?』, 『이상한 집』이 있음.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