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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 / 시골 큰집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장에 간 큰아버지는 좀체로 돌아오지 않고 감도 다 떨어진 감나무에는 어둡도록 가마귀가 날아와 운다. 대학을 나온 사촌형은 이 세상이 모두 싫어졌다 한다.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를 뒤적이다 훌쩍 뛰쳐 나가면 나는 안다 형은 또 마작으로 밤을 새우려는 게다. 닭장에는 지난 봄에 팔아 없앤 닭 그 털만이 널려 을씨년스러운데 큰엄마는 또 큰형이 그리워지는 걸까. 그의 공부방이던 건넌방을 치우다가 벽에 박힌 그의 좌우명을 보고 운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그 좌우명의 뜻을 나는 모른다. 지금 혹 그는 어느 딴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조합 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 앞에는 국화꽃이 피어 상그럽다 그것은 큰형이 심은 꽃. 새 아줌마는 그것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화사한 코스모스라도 심고 싶다지만 남의 땅이 돼 버린 논뚝을 바라보며 짓무른 눈으로 한숨을 내쉬는 그 인자하던 할머니도 싫고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시외버스 정거장
을지로 육가만 벗어나면 내 고향 시골 냄새가 난다 질퍽이는 정거장 마당을 건너 난로도 없는 썰렁한 대합실 콧수염에 얼음을 달고 떠는 노인은 알고 보니 이웃 신니면 사람 거둬들이지 못한 논바닥의 볏가리를 걱정하고 이른 추위와 눈바람을 원망한다 어디 원망할 게 그뿐이냐고 한 아주머니가 한탄을 한다 삼거리에서 주막을 하는 여인 어디 답답한 게 그뿐이냐고 어수선해지면 대합실은 더 썰렁하고 나는 어쩐지 고향 사람들이 두렵다 슬그머니 자리를 떠서 을지로 육 가 행 시내버스를 탈까 육 가에만 들어서면 나는 더욱 비겁해지고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시인의 집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도 마당에 피워놓은 모닥불은 훨훨 탄다 삼십 년 전 신혼살림을 차렸던 깨끗하게 도배된 윗방 벽에는 산 위에서 찍은 시인의 사진 시인의 아내는 옛날로 돌아가 집 앞 둠벙에서 붉은 연꽃을 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옛 백제의 서러운 땅에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모닥불 옆에서 훨훨 타오르고 있는 몇 개의 굵고 붉은 낱말들이여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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